"우리같은 사람이 설이 어디있느냐. 한달에 6번 밖에 일을 못해 설이라고 하지만 가족들 볼 면목이 없다." 새벽 어둠이 걷히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19일 오전 5시. 서울 광진구 노유동 노룬산 시장 부근 이른바 `인력시장'에서 만난 이모(64)씨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35년째 공사장에서 일을 했다는 이씨는 이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지난해 수출이 사상 최대를 기록하며 경기가 차츰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는 희망섞인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이날 새벽 서울 곳곳의 인력시장에서 만난 서민들의 체감경기는 영하의 날씨만큼이나 싸늘했다. ◆ `IMF 때보다 더 힘들다' = 인력시장에서 하루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설 대목이라는 느낌을 찾기 힘들었다. 서울 신정동 신정 네거리에는 새벽 4시40분부터 이미 3명의 일용직 근로자들이 나와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직자가 100여명까지 늘어났지만 6시가 넘어 일자리를 구한 사람은 불과 20여명. 나머지는 담배를 빼물며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정국성(50)씨는 "IMF 때보다 더 힘들다. 여기 모이는 사람 가운데 60~70%는 허탕을 친다"며 "여기는 그나마 용역업체가 끼어들지 않아 수수료 떼는 게 없어 그래도 일자리를 구하면 하루 7만~10만원은 받는다"고 말했다. 정씨는 "여기는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능력대로 벌어 먹고 사는 곳"이라며 "솔직히 노숙자나 다를 바 없다. 회사에 들어가려고 해도 받아주는 곳도 없고 벌벌 떨다들어가도 커피 한 잔 사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숨지었다. 이번 설에 고향인 속초에 내려갈 계획이라는 김진태(48)씨는 "아무리 선물 살 돈도 없고 힘들지만 고향에는 가볼 생각"이라며 "여기 사람들과는 계속 만나야 다음에 일자리를 구할 수 있어 허탕칠줄 알면서도 그냥 나온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 3가의 또 다른 인력시장. 골목에는 설을 앞두고 음식점에서 일할 일용 노동직을 구하는 2~3곳의 인력센터 직원들이 오전 5시께부터 바람막이 골판지를 세워놓고 불을 쬐고 있었다. 인력센터 관계자는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예년에 비해 30%가량 늘었지만 일자리는 거의 반 정도 줄어 헛걸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새벽 어스름이 걷힐 무렵인 오전 7시께 북창동 인력시장은 120여명이 몰렸지만 개장과 함께 10명 정도만 일자리를 구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날 노룬산 시장입구에서 만난 박모씨는 새벽부터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어떤 사람들은 `노가다'판에서 일해 모은 돈으로 경마장이나 화투판으로 달려가기 일쑤"라며 "30년동안 건축현장에서 일했지만 희망이 없다"고 탄식했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 만난 박모(26)씨는 "회사가 설 연휴에 1주일을 쉬어서 명절 비용이라도 마련하려고 인력시장에 나왔다"며 "요즘은 직장있는 사람들도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이곳에 많이 나온다"고 털어놨다. 관악구 봉천동 현대시장 입구. 이곳은 1년 내내 각종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모이는 곳이다. 다른 인력시장과 달리 일당 잡부는 거의 없고, 대부분 나름대로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25년째 이곳에서 일하며 두 아들을 대학생과 중학생으로 키웠다는 조모(55)씨는"기술자들이라 하루 일당이 13만원 정도지만 겨울에는 한달에 많아야 열흘정도 일한다"고 말했다. ◆ 새벽 열기 사라진 재래시장 = 서울에서 새벽을 가장 먼저 여는 동대문, 남대문 시장은 환한 불빛으로 한낮을 방불케했지만 정작 손님들의 모습은 찾기 힘들고 상인들만 주름진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동대문 시장에서 8년째 모피의류 도매상을 하는 김기혁(42)씨는 "돈벌이가 되는, 지방 손님이 사가는 물건이 언제부턴지 많이 줄었다"며 "TV에서는 경기가 좋아질 거라고 하지만 기대는 별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청바지 전문점을 운영하는 박호석(35)씨는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도 IMF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는데, 잠시 반짝하더니 작년인가 재작년부터 또 마찬가지인 것 같다"며 "백화점들이 세일을 해대니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대문 시장에서 잡화상을 하는 박준형(35)씨는 "건물세, 전기세, 수도세 내고 나면 손에 쥐는 건 거의 없어 정말 부도 날 지경"이라며 "이미 경기가 바닥 수준이지만 더 나빠질 것 같다"고 걱정했다. 박씨는 "IMF 때는 나라가 어려웠다지만 서민들은 그래도 주머니에 돈이 조금씩은 있었다"며 "요즘은 신용불량자가 막 쏟아져 나와 그런지 개인들도 완전히 지갑을 닫았다"고 전했다. 남대문 시장상인들은 불경기 때문에 서로 만나면 이야기하는 것도 꺼리게 된다는 게 상인들의 설명이다. 박씨는 "설 대목인데도 평소보다 장사가 안되니 어떻게 명절을 보낼지 걱정"이라며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친척들 선물도 해야하는데..."라고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울=연합뉴스) 강훈상 이광철 임주영기자 hskang@yna.co.kr gcmoon@yna.co.kr z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