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해결의 열쇠는 한국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80년대 초반부터 20여년간 한국 경제의 발자취와 변신과정을 연구해 온 후카가와 유키코 도쿄대 교수(46)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답변을 중간에 자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가 보는 한국 경제의 현주소는 다른 때보다 더 근심으로 얼룩져 있다. 대다수 이코노미스트들이 정치 현안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것과 달리 그는 선거를 의식한 인기 정책이 경제 혼란을 부추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사회에는 외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누적된 스트레스와 피로가 남아 있다고 지적한 그는 빈부격차 확대, 청년 실업 등에 대한 걱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오늘의 한국은 나이 들고 돈 쓸 곳이 많아진 중년에 해당한다고 비유한 뒤 "시련을 극복할 정책 수단의 폭이 과거에 비해 좁아진 것이 문제"라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정부의 특혜와 보호 울타리에서만 큰 것은 아니며 국제경쟁에서 싸워 이긴 곳도 많다고 지적하고, 이들을 격려하고 분발하도록 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경제산업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도 활약 중인 그를 도쿄 가스미가세키의 연구소 자료실에서 만났다. [ 대담 : 도쿄 = 양승득 특파원 ] ----------------------------------------------------------------- -한국 경제에 대한 외국 이코노미스트와 언론의 시각에 걱정스러운 구석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현주소를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97년의 외환위기와 지금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97년 위기가 밖에서 닥쳐 온 것이긴 했지만 한국 내부에서도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견해가 쭉 있었습니다. 금융회사의 부실채권 문제라든지, 대기업들의 지배구조라든지 하는 것들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국민적 컨센서스가 강하고도 자연스럽게 형성됐습니다." -다른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97년 위기의 핵심은 개혁입니다. 한국 사회와 경제에는 당시의 개혁에 따른 피로와 스트레스, 반발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다 전에 없었던 극단적 개인주의와 인터넷 문화, 정권 교체 이후의 과도기적 혼란이 가세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풀 수 있는 정책 선택의 폭은 극히 좁아져 있습니다.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경기를 살리는 동안 기업 채무는 줄었다 해도 가계 부채는 크게 늘었습니다. 은행들은 소매금융에 치중하면서 개인부채를 키우는데 한 몫했습니다. 일본에 비하면 걱정할 수준은 못되지만 국가는 국가대로 여기 저기 돈 쓸 곳이 많아지면서 재정 적자가 빠른 속도로 불었습니다." -한국의 경제 활력은 해외 변수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지 않습니까.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악재는 대외 여건도 좋지 않다는 겁니다. 97년은 미국 경제가 건강했고 IT(정보기술) 경기가 호황을 타고 있어 위기탈출의 지렛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예에서 볼 수 있 듯 유럽 경제도 신통치 않고 미국의 통화가치 절상 요구는 어느 때보다 뜨겁습니다. 정책 운영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외부 사람들은 심각하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들입니다." -경제, 사회 각 부문의 시스템 개혁 논의가 한국에서는 뜨겁습니다. "좋은 테마이고 옳은 방향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한국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한국은 젊은 에너지가 넘치는 사회여서 그런지 몰라도 흑백논리에 치우치는 인상이 짙습니다. 목소리가 큰 쪽이 승리를 챙기고 이익단체는 저마다 큰 소리를 내려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농업 문제, 자유무역협정(FTA)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그 같은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흑백논리로만 모든 것을 단정할 수 없습니다. 모두의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성숙된 사회는 흑백논리로 사안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정책 결정 시스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한국 사회의 계층간 왜곡, 균열이 심각한 점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국민들의 교육열이 높아 너도 나도 좋은 동네, 좋은 부동산에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이같은 욕구를 채우기란 불가능합니다. 정책 당국자들은 여러 부문에서 비롯된 갈등 치유와 화합을 위해 국민들과의 대화에 보다 귀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봅니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선거입니다. 선거를 의식하면 어느 쪽도 정책 수립, 집행에 엄정하지 못합니다. 정치권과 정책 당국자들이 인기만 생각하고 비현실적 정책을 남발할 경우 나라가 엉망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외국 자본이 앞 다퉈 들어올 수 있도록 매력 넘치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각오입니다만. "시장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한 정책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의 투명성은 기회 평등으로도 연결됩니다. 시장이 투명할 경우 정확한 판단을 하는 투자자라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연 학연으로 뭉치고 정보를 은밀히 나눠 가진 극소수 일부 계층이 기회를 독점하다 보면 외국 자본들에는 시장이 왜곡되게 비칠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고자 해도 도전 기회부터 평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정책 결정도 그렇습니다. 고위 관료일 수록 확고한 주관을 갖고 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외부로부터 예측 가능하도록 해야 합니다." -올들어 북한 핵 문제와 노사 관계가 한국 경제를 위협하는 불안 요인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저는 노동 문제가 더 시급하다고 봅니다. 북한 핵 문제는 한국 혼자만의 힘으로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와 조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노동 문제는 한국,한국 국민들이 하기 나름에 달려 있는 것 아닙니까. 노동 문제를 더 이상 정치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협상 과정에서도 정부는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룰만 정해주면 됩니다." -한국 경제의 돌파구는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까. "한국 기업들의 저력을 한국 스스로가 낮게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 대기업들이 인도, 브라질 기업들처럼 정부의 보호와 혜택으로만 커 온 것은 아닙니다. 국제 경쟁에서 싸워 이긴 기업들도 많습니다. 말하자면 잘 하는 기업들에는 분발하도록 더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성원이 필요합니다. 한국 정부가 최근 핵심 미래산업으로 여러 가지를 선정하고 확고한 육성의지를 보였습니다만 여기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한국 산업계의 실력과 장점을 정확히 파악해 장기를 최대한 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 yangsd@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