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장묘 문화의 변천사는 각 시대의 종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종교는 국책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나라의 기조가 되는 종교에 따라 다양한 장묘 문화가 형성됐다. 특히 조선시대의 유교는 우리의 장묘 문화의 주축이 되고 있다. 농경사회를 바탕으로 한 소수인구 중심의 매장풍습은 오늘날까지 우리사회에 깊게 뿌리내려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강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에게 매장관습은 단순한 죽음의 절차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재생의 의미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시대 이전=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장묘 형태로 알려진 고인돌은 기원전 10세기부터 3세기까지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분묘형태의 고인돌은 단순구조의 돌무덤의 하나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며 우리 나라 전국에 걸쳐서 분포해 있다. 삼국시대 이전의 장례제도로는 이중 장제와 공동묘지제 풍습이 있었다. 이중 장제는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을 해 탈육시킨 후 유골만 수습해 관속에 넣는 것. 공동묘지제는 사후에 유골을 수습해 온 집안 사람들이 한 관속에 함께 들어가게 되는 가족묘 제도였다.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삼국시대에는 나라별로 다양한 장묘문화가 형성됐으나 주류를 이룬 것은 묘제 중심의 매장풍습이었다. 장묘 형태의 급격한 변화는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이뤄진다. 불교의 영향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불에 태워 처리하는 화장법이 성행했다. 불교가 중국에서 전래된 뒤부터 다비(茶毘)라 하여 승려가 죽으면 화장하는 풍습이 퍼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지증왕조(智證王條)에는 '502년(지증왕 3) 봄 3월에 명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였다'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와 부여와 같은 문화권에 있는 고구려,백제에서도 순장의 풍속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고려시대에는 불교식인 화장과 유교식 매장제도가 공존하는 시기였다. 원칙적으로 신라의 묘제를 계승했으나,풍수설(風水說)을 중시해 방위(方位)를 엄격히 가려서 묘지를 정하기도 했다. 더불어 고려시대에 병사자(病死者)를 유기하는 풍습 즉,고려장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노인을 버렸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러한 사실이 고대사회에서 생산력 없는 노쇠자가 천대받은 일과 관련해 고려에서 늙고 병든 이를 버리는 고려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 듯하다. ◆조선시대=조선시대는 유교적·풍수 지리적 장례관습이 주를 이뤘는데,억불숭유정책으로 화장을 금하고 매장제를 강력하게 시행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묘지 풍수신앙이 크게 신봉되어 선산제가 시작됐고,묘역이 넓어졌다. 더불어 호화분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흔히 주산(主山)을 뒤로 업고 남쪽을 향하며,주산의 줄기는 좌우로 뻗어 청룡(靑龍)·백호(白虎)를 이루고,주수(主水)와 객수(客水)는 흔히 그 앞에서 합하는 곳을 명당이라고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