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중은행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배영수씨(42)는 오는 9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최근 몇년간 실시된 대대적인 해고의 칼날은 비켜났지만 2∼3년뒤엔 그 대상이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이민을 택하게 했다. 더구나 애들 교육을 위해 서울에 입성하려던 계획도 지난 2년간의 집값 폭등으로 물거품이 됐다. 월급 대부분을 두 아이의 사교육비로 쓰면서 생활고에 지친 부인도 그의 결정에 순순히 따랐다. 연매출 10억원을 올리며 잘 나가는 음식점을 운영했던 최은식씨(40)는 지난해 점포를 정리했다. 2년전 조기유학을 위해 부인과 아이들을 호주로 떠나보낸 뒤 점포에서 살다시피 하던 그는 '기러기 아빠' 생활이 지긋지긋해졌다. 그는 점포를 판 자금으로 최근 호주 캔버라 근처에 단독주택을 샀다. 호주 이민 거점과 아이들 유학을 겸한 다목적용으로 마련한 것이다. 요즘은 한달은 호주에, 한달은 한국에 살면서 본격적인 이민을 준비중이다. 증권회사 대리인 최희석씨(33)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동기와의 승진 경쟁에서 밀리면서 마흔살이 넘어서도 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전문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나이가 같지만 경영학석사(MBA) 학위와 외국계 회사 경력을 갖춘 재미교포가 사업부장으로 특채된 것을 보고 더욱 분발하게 됐다. 지난 1년간 주경야독하며 GMAT, TOEFL에서 높은 점수를 딴 그는 내년초 MBA에 도전한다. 최근 이민을 위해 이주공사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 대기업 임원이나 부장급은 물론이고 자영업자, 중소기업 사장, 대학교수 등 적지않은 중산층들도 이민 열차에 몸을 싣는 추세다. 호주 이민알선 전문업체인 파라마타 이민법률의 김윤수 대표는 "외국에서 잠시라도 살다온 사람일수록 한국을 떠나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이민이 저소득층에서 점차 중산층 이상으로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호주 캐나다 등 한국인이 선호하는 나라들이 꾸준히 이민자격을 까다롭게 하고 있지만 이민자 수는 줄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민 대기자는 급속도로 늘고 있는 추세다. 해외이주자는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크게 늘어 2000년에는 1만5천여명에 달했고 2001, 2002년에도 각각 1만1천명을 넘었다. 올해도 지난 4월까지 3천2백68명이 다른 나라에서 삶을 꾸리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외교통상부 재외국민영사국의 박혜윤 서기관은 "이민자의 숫자가 다소 줄어든 것은 미국 호주 등이 이민 자격을 크게 강화한데 따른 것으로 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은 줄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민 희망자의 증가에는 교육열도 한몫 한다. 사교육비로 아이 1명당 한달에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1백만원 이상을 지출하고 아이와 엄마만 조기유학을 보내는 '기러기 아빠'가 늘면서 "이럴 바에는 아예 이민을 가버리자"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온누리이주공사 안영운 사장은 "요즘 이민 상담자의 70∼80%는 이민을 가려는 이유로 자녀교육을 꼽는다"고 말했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95년 2천2백59명에 머물렀던 초ㆍ중ㆍ고 조기유학자는 외환위기 여파로 98년 1천5백62명까지 줄었다가 다시 급증세를 타기 시작, 2001년에는 7천9백44명으로 늘었다. 정확한 통계가 나오진 않았지만 지난해에는 1만명을 훌쩍 넘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유학이나 이민이 꼭 '행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현지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역이민하는 사람도 점차 늘고 있다. 조기유학한 아이들의 학업성적은 만족스럽더라도 부모와 가치관이 달라져 가족 관계가 무너지는 사례도 있다. 캐나다 이민 전문업체인 코노바의 이종훈 이사는 "이민에 성공하려면 일단 눈높이를 이민가는 나라에 맞춘 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스포츠(캐나다의 경우 아이스하키) 등에 관심을 갖는 것도 현지 정착에 성공하는 한 방법이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