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범구 연세의대 흉부외과 교수(64.전 세브란스병원장)는 매주 둘째 일요일마다 왕진 가방을 챙겨든채 김포공항에 간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 잠시 눈을 감으면 김해공항에 도착한다. 최종 목적지는 부산시 금정구 부곡3동 심장환자상담소요양원.조 교수의 진료를 기다리는 심장병 어린이들이 있는 곳이다. 조 교수는 의료취약지역에서 심장병 어린이들에게 헌신적 의술과 참다운 사랑을 베풀어온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보령제약(회장 김승호)과 의협신보(발행인 신상진)로 부터 "보령의료봉사상"을 탔다. 조 교수는 "요즘들어 나만을 위해 살고자 애쓰지말며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곧 자기의 행복으로 돌아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은 조 교수를 가리켜 "후배들에게는 "호랑이"라고 소문날 정도로 엄격했지만 어린 환자에게는 제2의 아버지였다"라고 평가했다. 조 교수의 부산 왕진 여행은 올해로 25년째가 된다. 그간 진료한 어린이만 3만여명,수술해준 어린이가 1천4백여명에 달한다. 이 생활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산 메리놀병원 간호사였던 김 미카엘라 수녀(현 부산 심장환자상담소요양원장)는 수술은 커녕 진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심장병 어린이를 구하기위해 애쓰고 있었다. 한미재단을 통해 미국 현지 병원에서의 무료수술을 주선했지만 언어 소통문제 등으로 어려움이 따랐다. 그녀는 궁리 끝에 미8군 군의관인 페즐라 박사의 소개로 미국 텍사스 심장연구소,메이요병원 등에서 공부를 하고 막 돌아온 조 교수를 만났다. "부산에 처음 갈때만 해도 '한번 가보지'라는 생각 정도였죠.막상 진료를 마치고 난뒤 발길이 쉽게 떼어지지 않더군요. 하루라도 수술을 늦추면 죽을 수도 있는 어린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잊을수 없었습니다. 수녀님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자리에서 '한달에 한번은 이곳에 오겠다'고 약속했죠" 약속은 지켜졌다. 초창기만해도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비행기는 가격이 비싼던데다 요즘처럼 매시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로 토요일 오후 기차를 타고 내려간뒤 일요일 1백~1백50명의 환자를 돌본뒤 밤차로 올라와 월요일 정상적으로 출근했다. 기차표도 구하지 못하면 부산까지 손수 차를 몰고 갔다. 때론 강당에서,방에서,천막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그는 지금도 89년 12월을 잊지 못한다. 가톨릭 교단에서 어려운 가정의 심장병 어린이를 무료로 돌봐주기위해 2층짜리 건물을 짓고 심장환자상담소요양원이란 간판을 달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10년에 걸쳤던 보따리 생활도 끝낼수 있었다. 조 교수의 이같은 선행에는 친구 2명의 공이 컸다. 한 친구는 각종 검사기기를 사는 일을 도맡아줬다. 다른 친구는 자신이 경영하는 항공화물회사에 이사로 올려줘 항공료의 30%만 내고 외국을 다닐수 있도록 해주었다. "80년대만해도 최신 심장수술 기법을 소개한 논문이 의학저널에 실린뒤 몇달이 지나서야 국내에 소개됐죠.심하면 2~3년뒤에 알려지는 경우도 있었고요." 조 교수는 어린 생명을 보다 많이 구하기위해 부지런히 외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쫓아다녔다. 이 결과 국내에서 손꼽히는 흉부외과 의사가 될수 있었다. 조 교수는 외롭지 않다. 몇년전부터 장병철 박영환 홍유선등 제자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부산에 내려와 함께 심장병 어린이들을 진료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리놀병원의 김훈 이흥열 과장과 약사와 간호사들로 매달 빠지지않고 그를 돕고 있다. "열심히 운동하고 공부해 박사님처럼 훌륭한 의사가 된뒤 저보다 더 고통스러운 환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습니다" 연말이 되면 조 교수의 책상에는 이같은 내용의 편지와 카드가 수북히 쌓인다. 그는 오늘도 수술실에서 뿌듯한 마음으로 환자를 맞고있다. 최승욱 기자 sw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