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치명적인 상처가 우리 가족의 양단(兩斷)으로 드러났고, 우리 가족의 양단은 우리 민족의 상처로 표출된 것이야" 17일 새벽 큰형 기성(78)씨를 지병인 폐질환으로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재야운동가인 백기완(白基玩.71)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나지막한 분노로 큰형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4남2녀중 넷째인 백소장에게 큰형의 죽음은 분단된 조국현실과 그 속에 투영된 굴곡의 가족사를 눈앞에 다시 떠오르게 했다. 백소장을 비롯, 큰형 기성씨와 한국전쟁 당시 산화한 둘째형 기현씨 형제의 삶은 한국전쟁 때부터 분단된 한반도의 역사와 고통을 함께 해왔다. 기성씨는 분단이후 홀로 북에 남아 황해민보기자 생활을 하며 '사회주의자'로 청춘을 보낸 반면 기현씨는 24세이던 지난 51년 한국전쟁당시 국군으로 참전, '철의 삼각지대'인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산화, 형제가 엇갈린 운명의 길을 걸었다. 백소장은 "우리 3형제가 누구보다 우의가 두텁고 서로를 많이 아꼈는데, 우리끼리 총을 겨누고 갈린 것은 아직도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남아있다"고 읊조렸다. 기성씨는 한국전쟁 후 57년 월남했지만 곧바로 당국에 체포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10여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통일염원을 민족의 상징인 `백두산 호랑이'를 통해 나타내겠다는 생각으로 호랑이 생태에 대한 사진.자료와 관련 민족신화를 30여년간 수집해 `민족서'를 내려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백소장은 큰형의 죽음을 "외세에 인한 분단현실의 타살"이라고 애통해했다. 백소장 역시 지난 67년 고(故)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출범시켰고, 현재 그 맥을 이은 민족문제연구소장으로 일해오고 있다. 이 연구소는 민족학교운동을 벌이고 `백범어록' 등 각종서적을 편찬, 70-80년대유신반대, 통일.민주화운동 등 재야운동의 중심역할을 했고 이 과정에서 5차례나 강제폐쇄되기도 했다.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지만 백소장은 줄곧 빈소에 머물며 큰형의 마지막 가는길을 지켰다. 유족들은 "죽으면 내 몸을 기증하겠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19일 오전 발인후시신을 강남성모병원에 의학연구용으로 기증키로 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상헌기자 honeyb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