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외환 딜러".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 원장(53)에겐 늘 이런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70년대말 국내에는 "외환딜러"란 직업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 그는 당시 직장인 아메리칸익스프레스은행에서 뜻하지 않은 제의를 받았다. 비서직을 그만두고 외환딜러로 뛰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외국계 은행 중역 비서라는 직업도 연봉이나 경력면에서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1년 남짓 도쿄 홍콩 런던 뉴욕 등 해외 각지에서 딜링 현장교육을 받고 돌아온 시점은 80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삼성물산 자금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딜링 교육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5,6명을 팀으로 한 딜링룸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척한 분야에서 그는 14년간 한 우물만 팠다. 해외에서도 보기 드물다는 여성 "수석 딜러(chief dealer)"로 활약하며 돈도 많이 벌고 명성도 얻었다. 각광받는 21세기형 직업 분야의 선두주자로 부각됐고 "억대 연봉"이란 타이틀과 함께 신문에 곧잘 이름이 실리곤 했다. "딜러의 삶은 흥미진진했어요.스트레스 많이 받았지만요." 그는 눈코뜰새없이 바빴던 14년동안 전혀 힘든 줄 몰랐다고 회고한다.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장이 열리는 시드니 개장 시간에 맞춰 아침 7~8시에 출근해 쉴새없이 일했죠.미국에서 경제지표나 금리변동과 관련한 발표라도 있는 날이면 새벽 2~3시께 귀가하기 일쑤였고요." 그는 딜러의 스트레스는 일회성이 짙어서 어느 정도의 "오뚜기 정신"만 있으면 떨칠만 했다고 얘기했다. "딜링을 하다 보면 어떤 날엔 왕창 깨질 수도 있어요.그러면 다음날 승부를 걸면 되거든요.불은 불로 끄는 거죠.힘든 하루가 끝나도 집에 갈 땐 다 털어버리고 쌓인 게 전혀 없었어요." 그렇게 매료됐던 직업 세계를 그는 94년에 떠났다. "쉬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그만두고 6개월간 좋아하는 운동만 열심히 했어요.그런데 한달쯤 지나니깐 심심해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그래서 책을 썼죠." 그때 쓴 책은 "나는 나를 베팅한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이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는 95년에 또다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이번에는 독보적인 여성 외환 딜러에서 금융 교육자로 변신을 시도했다. 외환딜링 자산관리 기업신용분석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선진금융기법을 배우려는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에서 한국국제금융연수원을 설립한 것. 그때로부터 벌써 7년이 지났다. "저는 타고난 일중독잔가봐요." 그는 희곡작가인 남편이 "일밖에 모르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놀릴 만큼 아직도 일이 좋다고 말한다. "요즘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요일 오후께면 회사에 나와 5~6시간을 보내요.일에 대한 구상도 하고 독서도 하고... 저로선 아주 유익한 시간이죠." 벌써 불혹을 지나 5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 할 일이 산더미 같다는 김 원장. 그는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밝혔다. "저희 팀 동료들은 기업 신용분석 평가모델을 개발했죠.2005년에 발효될 "신바젤협약"(자기자본규제협약안)에 대응해 적절한 평가모델을 제시하고픈 게 제 바램이에요.또 개인자산관리 모듈을 개발해 교육과 금융을 결합시킨 컨설팅 사업에도 나설 계획입니다." 고성연 기자 amaz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