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시 창원공단내 입주한 효성기계공업. 공장 곳곳에는 수출 대기중인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서 있으며 이를 실어나르는 대형트럭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느라 휴일에도 생산라인은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97년말 부도로 현재 화의중인 기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회사 회생을 이끄는 주역은 이문호 노조위원장(51). 80년대 말만해도 이 회사 노조는 지역에서 두번째라면 서러워할만큼 강성이었다. 한해 조업기간이 3∼4개월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한때 47%에 달했던 시장 점유율은 18%까지 곤두박질쳤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선 '정치적' 노조활동을 중단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파업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지요." 이 위원장은 오직 근로자 권익을 위해 일하는 노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난 96년 노조위원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 위원장은 우선 노사간 소모전을 없앤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에 따라 그 해 임단협은 무교섭으로 타결했다. 97년에는 단 3일만에 끝냈다. 사측에 무릎을 꿇었다는 비난의 소리도 들렸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노조간부들이 전국 80개의 협력업체를 방문해 직접 시장조사를 벌였다. 납품기한을 정확히 맞춰달라고 호소도 했다. 협력업체들의 어려움을 듣고 개선방안을 회사에 건의하기도 했다. 결품손실을 줄이는 운동도 노사가 함께 벌여 나갔다. 4명이던 노조 상근자는 2명으로 줄였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외환위기 여파로 97년 말 계열사들의 보증문제로 회사가 부도를 냈다. 이 위원장은 허리띠를 더욱 졸라맸다. 2년에 걸쳐 상여금 6백%와 각종 수당을 삭감했다. '30분 일 더하기 운동'도 전개했다. 노사는 기술개발에도 적극 나서 현재 2백50여가지의 독자모델을 내놓고 32개국에 수출길을 뚫었다. 덕분에 연간 20만대의 생산체제를 다시 갖췄다. 지난 2000년 1백39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던 이 회사는 지난해 52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올해는 영업이익 규모가 1백40억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창원=김태현 기자 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