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한 지 얼마 안됐을 때다. 거실등을 고치러 온 전기기술자가 집안을 휙 둘러보더니 "텔레비전이 작네요" 했다. 다분히 "살림이 별 볼일 없다"는 투였다. 모자 장사는 머리 크기,치과의사는 치아 상태로 사람을 판단한다더니 전기업자는 가전제품의 종류와 크기로 한 집안의 형편을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요즘 분양하는 아파트 입주자들은 이런 "황당한" 경우를 당할 일이 적을 것같다. "빌트인(Built-in) 가전품"이라고 해서 냉장고 식기세척기 가스레인지 세탁기는 물론 벽걸이TV까지 설치돼 있는 수가 많으니까 말이다. 옵션인 곳도 있지만 아예 분양가에 포함시키는 데도 많다. 빌트인가전품이란 가전품의 색상 소재 등을 조절,실내 인테리어나 다른 가구에 어울리게 만든 붙박이 가전품을 말한다. 시스템키친에 이어 수납장식 냉장고가 인기를 얻으면서 오피스텔에서 중대형 아파트로 퍼지다 최근엔 소형아파트에까지 도입됐다. 2000년 3천5백억원이던 시장이 2005년엔 1조원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되고 이때문에 가전업체들은 붙박이 전용브랜드까지 내놨다. 빌트인가전품이 설치되면 깔끔하고 보기에도 좋다. 이사하면서 쓰던 걸 그냥 가져가야 하나,새것으로 바꿔야 하나,기왕 사는 것 제일 좋은 걸 사나 중간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고민할 일도 없고,다른 집 제품과 비교당할 일도 없다. 그러나 빌트인 가전품은 절대 "공짜"가 아니다. 분양가에 포함된 만큼 "내돈" 내고 내가 사는 것이다. 묶음판매인 만큼 따로 사는 것보다 싸야 할 텐데 따져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이사할 때 갖고 갈 수 없고,꼭 필요하지 않은 걸 살 수도 있다. 부엌용품의 경우 따로 빼내기 어려워 고장나면 수리하기도 곤란하고 위치를 바꿀 수도 없다. 게다가 한번쯤 뒤집어 생각해보면 가뜩이나 획일화된 아파트의 사각 공간에서 가전제품마저 똑같은 물건을 강요당하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행은 이처럼 개성과 독자적 사고를 빼앗는 일이 잦다. 옷도 그렇지만 인테리어나 가구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물건 방식 형태가 눈길을 끌긴 하지만 막상 써보면 "이게 아닌데" 싶어지는 때도 많다. 모델하우스마다 놓인,낮은 거실테이블도 한 예이거니와 근래 분양되는 아파트의 괜스레 넓은 부엌도 그렇다. 외환위기 이후 신흥건설업체 W가 수납장식 냉장고와 기존 가스레인지대 외에 스탠드바 형식의 별도조리대를 추가한 널찍하고 화려한 주방으로 분양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뒤 주택건설업체마다 경쟁적으로 주방을 넓고 아름답게 꾸미느라 애쓴다. 크고 넓은 주방은 분명 시원해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조리대가 두세군데씩 설치된 부엌이 필요한 걸까. 맞벌이부부는 갈수록 늘고 따라서 외식 비중이 급증하는데.현재 분양중인 아파트에 사용자들이 입주할 때쯤이면 상황은 더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젠 아파트도 제발 "요즘 어떤 게 인기라더라"에 연연하지 말고 앞으로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설계해주면 좋겠다고 하면 무리한 요구일까. 소비자 역시 모델하우스에 "혹"하지 말고,식구들의 생활습관,입주할 때의 가족 상황,주부의 가사시간 등을 충분히 따지고.소비자가 똑똑하고 지혜로와야 건설업체는 물론 각종 생산업체들이 정신 번쩍 차리고 제대로 된 집,국제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게 될 테니까 말이다다. 본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