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전문회사 코스맥스 유권종 부장(42)은 10년 넘게 립스틱과 함께 살아온 남자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통해 개발된 립스틱 수는 8백여개. 립스틱 짙게 바르고 매일 아침을 시작해 짙게 바른 립스틱을 지우며 하루를 마감하는 생활이 이제 익숙해졌다. "웬만한 여성들이 평생 발라보는 립스틱보다 더 많은 립스틱을 발라봤을 걸요"라고 그는 웃으며 얘기한다. 그를 만나러 경기도 화성 향남공단에 있는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 눈에 띤 것은 립스틱 자국이 선명한 티슈가 가득한 쓰레기통과 수십개의 립스틱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상이었다. 한마디로 그의 책상은 화장대 같았다. 각종 서류가 수북히 쌓여있고 볼펜 색년필 등이 나뒹구는 일반 사무실의 전형적인 책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화장품을 만드는 남자,그렇다면 대리석 같은 얼굴의 꽃미남 아닐까"라는 상상을 하기 마련.하지만 윤 부장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그의 외모는 그저 평범한 아저씨였다. 하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립스틱의 달인(達人)"임을 의심치 않게 했다. "직업병이란 게 무서운가봐요. 여자들을 보면 시선이 입술에 딱 꽂히는 거예요. 특이한 색깔의 제품은 척 보면 어느 회사 무슨 제품인지 알 수 있거든요. 버스에 타면 항상 여자들 곁으로 가요. 그리고 옆에서 입술을 뚫어져라 보라보면 여자들이 이상한 사람보듯 흘기면서 가버리더라구요. 처음엔 얼굴이 화끈댔지만 이젠 만성이 됐어요. 처음 립스틱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입술에다 립스틱을 갖다대는 게 정말 어색했어요. 여직원들의 시선을 신경쓰다보면 립라인이 삐뚤삐뚤해져 더 우스광스럽기도 했죠.어떨 땐 테스트를 하기 위해 입술에 발랐던 립스틱을 말끔히 지우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 "펭귄 입술"로 거리를 활보한 적도 많았죠.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지난 지금은 모든 게 자연스러워요. (사진 촬영을 위해 립스틱 바르는 포즈를 취해달라는 요청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거울 앞에 앉아 새빨간 립스틱을 입술 위에 그었다.) 하루에도 20~30번씩 립스틱을 발랐다 지웠다 하니까 입술에 트러블이 종종 생기죠.저녁마다 영양크림을 발라 특별관리해요. 입술이 제 "밥줄"인데요.(웃음)" "남녀차별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걸 종종 보게 되는데 화장품 회사에서 남녀 차별이란 상상할 수 없어요. 누구 때문에 밥먹고 사는데요. 그런 생각하면 여자들한테 절대로 함부로 대할 수가 없죠.항상 여자들을 왕 모시듯 해요. 제가 개발한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여성 고객들을 보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새롭게 선보인 제품이 빅히트를 쳤을 때도 뿌듯하죠.("섹시넘버원 핑크""트로픽 오렌지"등 그가 내놓은 제품 중엔 여성들의 귀에 익은 인기상품들이 많다)" 립스틱을 만들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립스틱 선물을 많이 해요. 그 덕에 장모님한테 사랑받는 사위가 됐죠.신제품이 나왔을 땐 교회에 들고가서 나눠주며 반응을 살피기도 하구요. 때문에 아줌마들 사이에서 "인기짱"이랍니다. 집에 가면 테스트용 립스틱이 가득 해요. 딸애가 있는데 걔한테는 립스틱이 장난감이에요." "여성들이 옷에 의한 변화는 종종 시도하면서 화장을 바꿔서 변화에 도전하는 건 의외로 주저해요. 항상 립스틱도 바르던 것만 하고 섀도도 익숙한 것만 해요. 그러다 보면 그 색상이 자기한테 가장 잘 어울린다고 믿게 되는 거죠.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어요. 여러 색으로 바꿔 가면서 자기에게 가장 어울리는 색을 찾는게 중요해요. 또 한가지.한국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 립스틱 색깔이 짙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피부톤이 점점 어두워지니까 그런가봐요. 하지만 최근 들어선 화장품이 발달해 여성들의 피부 상태가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아줌마들도 젊은 아가씨들이 바르는 분홍 계열을 써도 괜찮아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요즘 전세계적인 유행 트랜드는 "ZEN(선)"이에요. 자연스러운 투명 화장이 유행 트렌드죠.립글로스 립틴트 같은 제품도 강세구요. 개인적으로는 빨간 흑장미색 립스틱을 좋아하지만요. 올해 유행 테마는 반짝반짝 펄이 담긴 옅은 분홍색이예요. 한번 시도해보세요" 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