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첫인상은 털털하고 과격하리라는 예상을 보기좋게 깨뜨렸다. 깔끔한 복장과 푸근한 미소,손님에게 인삼차 한잔 건넬 줄 아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소음와 매연에 부대끼며 쌓아온 삶의 무게만큼 그들이 무장한 프로의식도 남달랐다. 스스로를 도로 위의 커리어우먼으로 자부하는 "여성 택시드라이버". 도로에서 잠깐씩 마주치던 5명의 여성 택시기사들이 오랜만에 차를 세우고 반갑게 만났다. ## 남자도 혼자타면 얌전한데...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게 1978년도였어.사실 그때만 해도 여자가 운전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도 못했던 때였잖아.처녀가 운전하니 얼마나 신기해 보였겠어.정말 짖궂은 남자 손님들 많았지.전화번호 안써주면 안내리겠다고 막무가내로 나오는 손님들이 있었어. -특히 남자 손님 중에 혼자서는 얌전한데 모이면 용감해진는 경우가 있었단 말이야.서넛이 타게 되면 여자 얘기를 하게 되곤 하지.마치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성희롱식 발언을 할 때도 있었지. -그래도 택시문화가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 같아.손님들도 많이 점잖아졌지.예전보다는 여자 택시 운전자들도 많아졌으니까. 예전처럼 희귀동물 보는 식의 눈길은 적어졌어.지금은 여성 운전사라서 오히려 더 깍듯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니까. -택시 안에만 앉아있으면 웬만한 화제 거리에 다 끼어들 정도야.하루 종일 라디오를 켜 놓고 있는데다 손님들이 하는 이런 저런 얘기 듣다보면 요새 떠도는 뉴스는 다 듣는 것 같아.거짓말 조금 보태서 하루에 시사 주간지나 연예잡지 몇권 읽은 정도는 되는 것 같다니까. ## 장거리 많아지면 호황? -경기가 좋아진다면 여자들 치마길이가 짧아진다지?.택시운전사들은 장거리 손님 숫자로 파악하지.경기가 좋으면 장거리 손님이 늘어나거든.요샌 장거리 손님이 많아졌더군.1~2년전만 해도 단거리 손님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경기가 많이 좋아지긴 했나봐. -주로 회사 얘기하다보면 예전에는 어두운 얘기들 많이 했는데 요샌 밝은 얘기들을 많이 하는 것 같아.보너스가 늘었다거나 밀린 임금을 받았다거나 하는 얘기들 말이야. -뭐니뭐니 해도 요즈음 최대화두는 정치지.남녀노소 불문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어떻다,한나라당 내분이 어떻다 얘기하는 걸 모변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음을 실감해. -말도 마.한번은 오밤중에 술취한 손님을 태웠는데 "어서 오세요"하고 인사했더니 놀래서 내리더라구.조금있다가 다시 앞으로 타더라.이유를 물어봤더니.집에 간다고 택시 탔는데 "어서오세요"하는 여자목소리가 들려서 또 다른 술집에 온줄 알았다는 것이야.참. ## 취객은 영원한 애물 -난 그래도 밤에 술취한 인간들도 무시하진 않는 편이야.특히 눈이나 비올때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 보면 너무 안스러워서 태워주곤 하지.그럴땐 "우리 아줌마 최고"라는 귀여운 술꾼도 있으니까. -물론 재미있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 7~8년전인가,종로에서 북한산 중턱에 있는 절까지 40여분동안 데리고 갔는데 할증요금을 안내겠다고 버틴 손님이 있었지.언쟁이 붙었는데 나중에는 욕설까지 하더니 차에 돌맹이까지 던지는 거야. -술에 만취되서 내내 자다가 내릴때 되서 "지갑속에 있던 수표가 없어졌다"며 버티는 무조건 우기기파 손님은 정말 기도 안찬다. ## '겨울연가'도 한번 못봐 -출근은 보통 오후 5시께 해서 새벽 3~4시가 돼야 집에 들어와.솔직히 낮에 운전하는 게 덜 고되긴 한데 그래도 낮에는 시내 교통이 워낙 밀려서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크거든. -밤운전만 계속 한지가 벌써 10년이네.처음엔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력이 났다. 그나마 아쉬운 점이라면 TV드라만 한번 맘놓고 볼 수 없다는 것.요즘 그 유명하다는 TV 드라마 "겨울연가"도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다니까. -피곤해도 운전끝나면 성취감이 더 큰 것 같아.2~3일전에는 새벽에 수원까지 손님을 태웠지.그리고 서울로 오려는데 좀 막막하더라고.그런데 한 손님이 손을 들더니 "서울 북가좌동"을 외치는 거야.(모두 부러운 듯 감탄)그 기분은 못 잊을 거야. -새벽에 한강다리 건너가는 여대생이 보이길레 태워준 적도 있어.아마 남자라면 무슨 납치범인줄 알고 어디 탔겠나. 그나마 나같이 예쁜 여자니까 선뜻 탔을 거야.물어보니 친구들 만나다가 차가 끊기고 차비도 없어서 걸어간데.신림에서 고덕동까지 말이야.지방에서 올라와서 집에도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그래서 집까지 무료로 태워다주고 다음날 아침식사하라고 돈까지 쥐어줬지.지금은 잘 지내고 있을래나. -자기 부인한테는 못하는 이야기를 나한테 털어놓는 사람도 많지.생전 처음보는 사람인데다 우락부락한 사람들 아니니 얼마나 편하게 할 수 있었겠나. 한 손님은 자기가 실직했는데 이렇게 아주머니께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니 힘이 넘친다는 얘기를 하더군.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하더니 내릴 때 식사라도 하라고 돈을 보태준 적이 있어.돈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다른사람한때 조금이나마 행복을 줬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어. -난 언젠간 중학교 1학년쯤 되보이는 여자애를 아침에 서울역에서 태운적이 있어.세브란스 병원을 찾더라고.지방에 사는데 주말마다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치료를 하러 온다고 하데.그런데 다음주에도 서울역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그 애를 태운 것이야.어찌나 놀랍던지.그 뒤로 친해져서 그 시간이 되면 서울역 앞에서 대기했지.그 애도 택시 하나씩 살펴보다가 내 차를 발견하면 웃으면서 타곤 했어.한 다섯번쯤 만났나. 나중에는 부모랑 언니랑 같이 와서 같이 식사를 대접받은 적이 있지. ## 애들 친구한테 인기 '짱' -애들? 좋아하지.우리 아들은 엄마가 너무 멋있데.외환위기때 다른 가장들 실직하고 그랬는데 엄마가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든든하다는 거야. -애들 친구들 한테도 인기 짱이지.대중교통이 끊어지고 귀가시간이 늦어지면 데리러 가기도 해.올해 대학교 들어간 아들녀석이 가끔 술먹고 늦으면 전화해서 데리러 가곤 했지.아들 친구들까지 각 집에 "배달"하고 나면 그날 저녁 일당(?)은 날라가버리지만 그래도 엄마 하는 일에 뿌듯해 아는 아이 덕에 힘이 나는 것 같아. -세상 참 좁다고 말하는데,정말이다. 우연히 길 돌아다니다가 전화 약속 한 것도 아닌데 아들 딸,심지어 퇴근하는 남편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약속장소나 집까지 태워주면 무지 좋아한다. 남편도 가끔 "어디 무서워서 바람피겠나"라는 농담까지 할 정도야. ## 내 일 한다는 게 즐거워 -오래 앉아있다보니 허리가 늘 골치야.이젠 딸아이가 집안일 다 해주지.하지만 집안일 소홀히 해가면서 택시운전한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그래서 집안 대,소사나 애들 일은 꼭 내가 챙길려고 해. -운전은 허락되는 한 계속 할 거야.일을 한다는 자체가 너무 좋거든.돈으로 살 수 없는 인생경험을 하는 거지.길이 좀 막혀서 짜증날 때도 있지만. 고경봉.이방실 기자 kgb@hankyung.com .............................................................. [ 대담 참가자 ] 전정순(43) -운전경력 16년.남편과 1남1녀.자가용을 끌고다니다가 운전에 재미를 붙여 택시운전을 시작.운전이 좋지만 그래도 가정이 첫째라고. 홍정희(45) -운전경력 24년.남편과 1남1녀.처녀시절 택시기사였던 형부 택시를 몰래 운전해 통금시간에 돌아다녔다고 한다. 지금도 운전은 여전히 재미있다. 이영자(48) -운전경력 24년.시어머니와 3남.아침 10시에 출근해서 저녁때 잠깐 집에 들르고 다시 일을 나가는 맹렬 여성. 황영순(40) -운전경력 9년.남편과 3녀.진학을 앞둔 딸들한테 제대로 관심을 갖지 못해 미안하다고.운전을 평생직업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숙희(45) -남편과 1남1녀.8시에 아침식차를 차리고 출근해서 저녁 8시에 들어와서 저녁식사를 차린다. 체력이 튼튼해서 피곤함을 모른단다. 항상 활기넘치는 여장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