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역삼동 우신빌딩. 8일 점심시간이 끝나갈 쯤인 오후 1시35분.건물 안내데스크에서 푸르덴셜보험 설계사 김종운씨(41.성남시 금곡동)가 수위 아저씨와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김씨가 교통 체증으로 고객과의 약속 시간에 5분 가량 늦어 황급히 달려들어가자 수위가 가로막은 것. 김씨는 '잡상인이 아니라 라이프플래너(LP)입니다'라며 멋쩍게 웃는다.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출신으로 잘 나가던 벤처기업 최고 재무담당자(CFO)에까지 올랐던 김씨가 '아줌마'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보험설계사가 된지 이달로 7개월. 이젠 '사수'격인 김성수 세일즈매니저(SM)의 동행 없이도 고객 상담에 막힘이 없을 정도로 일이 몸에 배었다. "입사 초 매주 1건 정도에 불과했던 종운씨의 계약 실적이 이젠 4건 정도로 푸르덴셜생명 평균치(3.5계약)를 웃돌고 있어요" 세일즈매니저는 김씨의 빠른 변신에 감탄조로 칭찬을 늘어 놓는다. 김씨가 40이 넘은 나이에 보험설계사로 정착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는 외환위기로 10여년간 일해오던 S그룹을 나왔다. 인생 후반부를 새로 시작하는 심정으로 미국 공인회계사 시험에 도전했다. 1년 만에 자격증을 딴 그는 이듬해인 2000년 3월 벤처기업인 G사의 CFO로 스카우트됐다. 무엇보다 자격증을 인정받아 '평생직업'을 찾은 것이 너무 뿌듯했다. 하지만 그는 1년반여 만에 G사를 떠났고 이와 비슷한 경험을 두 차례씩이나 되풀이했다. 김씨는 "남은 인생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벤처업계의 풍토가 '머니게임'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너무 실망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 노골적으로 재무제표 등 서류를 조작해 줄 것을 요구하는 큰 손 투자자들의 압력에 작별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김씨의 좌절을 전해 들은 전 직장 선배가 보험을 권했다. 김씨는 보험 일이 기대 이상으로 적성에 맞아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능력껏 일하면서 실적을 가감 없이 평가받고 보상받는 직장 풍토가 매력적이라고 했다. 그로선 의미있는 변신이었지만 주위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회계사 과잉 공급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신'이라든가, '벤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대기업 출신의 한계'로 치부하는 전 직장이나 지인들의 눈초리가 견디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남편이 힘든 만큼 부인 한희자씨(39)의 마음 고생도 컸다. 한씨는 "동창회 같이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에서 남편이 여자들의 전유물로 인식돼온 보험 판매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야 할 때면 솔직히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선 주위 시선도 차츰 달라지고 있다. 대학 선배인 장민규씨(44)는 "40대에 접어들어 인생 끝까지 승부를 걸만한 새 일을 찾는 사람들을 많이 보지만 막상 용단을 내리는 것이 쉽지는 않다"면서 "후배지만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