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전설적인 4인조 팝 그룹 비틀스의 리드 기타리스트로 29일 58세의 일기로 후두 암으로 사망한 조지 해리슨은 비틀스로 활동하던 1960년대 선구자적인 작품들로 대중 음악계에 확고히 자리잡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간혹 격렬하기까지 한 록 세계에 드물게 영향받지 않은 선량한 인물로 팬들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더 잘 알려진 음악인으로 자리매김될 수도있다. 천성적으로 수줍음이 많고 조명을 꺼리던 그는 1960년대 접어들어 비틀스와 합류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의 비틀스 합류는 다른 동료였던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보다 뛰어난 기타 연주 덕분이었다. 무뚝뚝한 표정의 더벅머리인 그는 비틀스 합류 초기에도 조용한 성품을 유지해 거의 익명의 비틀(풍뎅이)로 남았으며, 한때는 존, 폴, 링고스타와 다른 한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칼 퍼킨스의 영향을 받은 그의 능숙하고 직관적인 기타 연주는 비틀스를 엮어낸기초가 됐다. 비틀스 초기시절 그의 작곡역량은 레넌과 매카트니 콤비의 다작(多作)의 천재성에 의해 빛이 가렸지만 '돈 보더 미(Don't Bother Me)', '아이 니드 유(I Need You)'는 후기작인 '택스맨(Taxman)'이나 신비감 넘치는 '위딘 유 위드아웃 유(Within YouWithout You)', 그리고 그 후의 '섬씽(Something)'과 '히어 컴즈 더 선(Here ComesThe Sun)' 등 걸작들을 예고하는 전조가 됐다. 그의 인도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은 팝 음악계의 조류를 바꾼 것은 물론, 나머지비틀스 멤버들을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 및 환각제의 일종인 LSD와 접하게했다. 그는 `노르웨기언 우드(Norwegian Wood)'를 통해 일찌감치 서방 음악계에 인도전통악기인 시타르를 알리기도했다. 밥 딜런, 로이 오비슨, 톰 페티 등 전설적인 록 스타들과 함께 지난 1988년 트래블링 윌버리스(Traveling Wilburys)를 결성한 후에도 그는 익명성속에서 살아오면서 `몬티 파이던스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Monty Python's Life of Brian)' 등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비틀스가 해체된후 그는 공전의 히트작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인 `마이 스위트로드(My Sweet Lord)를 포함한 야심작인 '올 싱스 머스트 패스(All Things Must Pass)'를 출시함으로써 4명의 멤버가운데 가장 먼저 솔로 아티스트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앨범은 그러나 후에 표절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첫번째 부인인 패티 보이드가 절친한 친구인 에릭 크랩튼에게로 돌아서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던 해리슨은 친구이자 시타르 스승인 라비 샹커와 함께 방글라데시난민 구호 콘서트를 갖기도 해 1980년대와 1990년대 각종 자선 콘서트의 선구가 됐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초기의 클래식의 팝계에 대한 영향을 희미하게 재생시킨 것이지만 1980년대에는 르네상스기를 갖기도 했다. 동료인 존 레넌이 뉴욕에서 피살된 1981년 이후에는 레이저 철망을 두른 자신의영국 집에 칩거하면서, 다른 멤버들인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 모두가 비틀스 해체후처음으로 함께한 `올 도즈 이어스 어고(All Those Year Ago)'를 제작했다. 해리슨은 지난 1990년대 흡연으로 인해 폐암을 앓기도 했지만 회복했고, 1999년에는 자신의 집을 침입한 정신이상자 도둑을 잡으려다 가슴 등을 흉기에 찔리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런던 AFP=연합뉴스) ciw@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