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법정관리 등 위기상태에 있을지라도 사전구상권(다른 사람을 대신해 채무를 변제할 처지에 놓인 채권자가 사전에 원채무자에게 채권의 상환을 요구하는 것)행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미리 약속하지 않았다면 채권자인 금융기관이 해당기업의 채권과 채무를 임의로 상계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 제7민사부(장경삼 부장판사)는 12일 기아자동차가 "법정관리가 시작된 지난 97년 자동차할부판매보증 채권과 회사채보증보험 채무를 상계한 것은 부당하다"며 서울보증보험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서보는 기아차에 9백62억여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특히 9백62억여원 가운데 절반에 대해 가집행을 허가,기아차는 대법원 판결 전에도 4백81억여원을 즉시 받을 수 있게 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서보측은 법정관리 신청 즉시 사전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약정을 맺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전구상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항변권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기아차는 사전구상권에 대해 항변하지 않겠다는 명시적인 약정을 맺지 않았다"며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않는 경우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아차는 96년 서보(당시 대한보증보험)와 자동차 할부판매 채권보증 계약을 맺고 또 서보는 기아차의 회사채 원리금 지급을 담보하는 보증보험 약정을 체결했다. 그러던 중 기아차와 계열사들이 97년9월 법정관리와 화의를 신청하자 서보측은 채권 확보를 위해 사전구상권을 행사, 자동차 할부판매 채권을 회사채 채무와 상계처리했다. 이에 기아차는 "사전구상권에 대한 항변권이 존재한다"며 소송을 내 지난해 4월 1심에서 패소하자 항소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