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사람인 하림씨(32)는 '5년차' 한국인이다. 그렇게나 어색하던 한국풍습도 이젠 몸에 착 달라붙었다. 반월공단의 염색업체 3∼4군데를 거치는 동안 이제는 숙련노동자 소리도 듣게 됐다.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고달픈 일상이지만 매달 1백10만원 가량의 거금(?)을 쥐는 맛에 피곤함을 잊는다. 매달 3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송금하는 그는 2,3년 뒤 귀국해 섬유공장을 차리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수도권에서 '코시안(코리안+아시안)'들의 꿈이 영글고 있다. 코시안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중국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한국으로 몰려온 노동자를 일컫는 신조어. 최근 들어 외국 근로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그들만의 집단 보금자리도 하나둘씩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다. 지하철 4호선 안산역 원곡본동을 비롯 구로동 쪽방동네,의정부 가능동과 송우리,구리시 마석의 성생가구공단,김포 검단공단 등이 대표적인 '한국속 이방지대'다. ◇'원주민 반,외국인 반'=99년부터 외국 근로자의 집단 거주지로 변모한 원곡본동은 '국경없는 마을'이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외국 근로자 비율이 높다. 동주민 2만여명 가운데 절반이 외국 근로자다. 외국 근로자를 위한 식료품가게 식당 등이 지난해 이맘 때만 해도 30여개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2백여개로 불어났다. 거리풍경도 이국적이다. 'ABBASi MUSLIM FOODS''Madina Halal Food''Cafe Nusantara'등 낯선 간판이 즐비하다. 이들 가게에는 향신료와 야채 양고기 비디오 이불 의류 국제전화카드 등 외국인을 위한 생필품이 빠짐없이 갖춰져 있다. 일을 마치고 즐겨 찾는 노래방엔 한국 노래는 물론 중국 필리핀 방글라데시 베트남 노래책도 구비돼 있다. 외환은행은 최근 동네 분위기에 어울리게 '국경없는 마을은행'이라고 이름붙은 사무소를 한달에 두번씩 열고 있다. 원곡본동 원주민(?)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외국 근로자들은 '중국동포회'를 비롯 국가별로 노동자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주민자치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매달 첫째주 토요일을 청소하는 날로 정해 한국인들과 깨끗한 거리 만들기에 나서는가 하면 마을축제 운동회 등도 열고 있다. ◇70년대 '쪽방' 이어받아=하지만 여타 외국인 거주지역은 아직 단순한 집단거주 형태에 머물러 있다. 구로공단과 인접한 서울 가리봉 5거리에서 구로동 일부까지는 속칭 '쪽방'으로 불리는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단독주택단지. 70∼80년대 국내 생산직 근로자들의 터전이었던 이곳은 이제 중국 근로자와 동남아인들의 차지가 됐다. 잠자리만 제공하는 이곳은 한사람당 15만∼20만원의 방세를 내고 생활한다. 여기에도 외국 근로자가 1만명 가까이 기거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영세 가구공장과 제조업체들이 산재해 있는 의정부 동두천 일대에는 5만명이 넘는 외국 근로자가 있고 1천개 가까운 가구업체가 모여 있는 구리시 마석의 성생공단과 김포시의 검단,인천 부천 수원 등지에도 수만명의 코시안들이 생활하고 있다. ◇'기회의 땅'한국=이들은 상당수가 불안한 신분속에 살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지역 동화노력은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원곡본동의 경우 동사무소 사무실을 빌려서 여는 한글학교,컴퓨터교실 등에는 매주 말 많은 외국 근로자들이 찾아와 한국 배우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에게 한국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회의 땅'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협의회의 안성근 사무국장은 "현실적으로 이들은 이제 없어서는 안될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며 "그런 만큼 고용허가제나 노동허가제 등을 통해 이들에게 합법적 신분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영 기자 song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