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안팎으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다. 밖으로는 세계 경제의 동시불황이 한국경제를 강타하고 있으며 안으로는 사회 지도층의 부정과 부패 등으로 인한 사회적 분열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의 중장기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할 뿐더러 강력한 경쟁상대인 중국이 세계시장을 무섭게 잠식해 오고 있으나 변변한 대응책도 없는 실정이다. 이처럼 좌표를 잃고 헤매는 지금 한국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한국경제신문은 창간 37주년 기념으로 사회 각계 원로들과의 긴급대담을 마련했다. 그 첫회로 국무총리를 지내고 학계 문화계에서 활동중인 이현재 박사(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사장 겸 호암재단 이사장)를 만났다. [ 대담 = 최경환 전문위원 ] --------------------------------------------------------------- -21세기 벽두부터 세계는 큰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습니다. 미국 신경제 퇴조로 전 세계적으로 불황인데다 미국 테러로 세계화도 주춤거리고 있고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간 충돌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테러 전쟁이 앞으로 세계질서에 미칠 영향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미국의 테러전쟁으로 제2의 냉전, 문명간 충돌을 걱정하는 소리가 많습니다. 저는 단기적으로 그런 징후가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이슬람내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존재하고 국가간, 민족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랍세계가 일치단결해 테러전쟁에 대항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랍내 산재한 과격세력의 저항은 계속되겠지만 세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패권을 가진 미국도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테러 전쟁으로 세계화의 템포가 다소 늦어지고 지역적 요소가 좀더 가미되겠지만 세계화라는 역사적 흐름은 이어질 것입니다" -미 테러전쟁은 세계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한국경제의 중장기 전망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테러 전쟁으로 인해 한국경제가 중장기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하지만 경제 외부적 요인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관건은 내생적 요인이 건강하느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진정한 경제체질 강화라든지 합리적 정책이라든지 내부 체질을 다지는데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 결과에 따라 한국 경제의 중장기 전망이 달라질 것입니다" -정부가 경기활성화를 위해 규제완화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실제적 효과보다는 립서비스에 그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경제난에 대한 정부의 대응노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정부가 미국이나 일본등에 비해 경기를 움직일 수 있는 재정과 금융수단이 부족해 폭넓은 정책을 펴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책의 일관성 부분입니다. 과연 정책이 정부와 민간 전문가가 모두 참여해 엄밀히 수립되고 그 정책에 따라 각 경제주체들이 움직였느냐에 대해선 회의적입니다. 예를 들어 구조조정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개념및 인식에 대해서 혼선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기업들의 무분별한 사업확장을 억제하고 업종전문화와 경영지배구조 투명화에 중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기업은 부실사업을 처분하고 유동성확보 노력에 치중하는등 생존의 대증요법처럼 급한 불을 끄고 연명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조나 근로자는 인력감축쯤으로 여깁니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구조조정 정책 집행에 차질을 빚게 합니다"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에 점수를 준다면 몇점이나 줄 수 있겠습니까. "점수를 매기긴 어렵지만 굳이 매긴다면 낙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등생도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치나 노동부문 구조조정은 상대적으로 미진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특히 정치 분야가 그런데요. 상위 의사 결정과정이라 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의 개혁 없이 선진국 진입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한 국가의 발전을 주도하는 건 역시 정치세력입니다. 따라서 개혁, 구조조정의 순위 또한 정치분야가 먼저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개혁의 물결이 경제와 국민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정치부문의 적폐는 아직 전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정치개혁 다음이 정부, 행정개혁이고 그 다음이 기업구조조정입니다. 기업구조조정은 기업부문을 통제하는 금융개혁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금융개혁이 되면 그 힘으로 기업개혁은 이룰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론 국민의식 개혁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개혁이나 구조조정이 기업 정부 정치 순으로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용호 게이트로 대표되는 사회지도층의 부정과 부패는 사회적 통합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사회지도층?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게 급선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사회지도층의 모범이 갖는 중요성은 백번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교육은 '모방효과'가 중요합니다. 선생님의 자세나 걸음걸이까지 제자들이 따라간다는 얘기죠.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리더십과 도덕성을 갖춘 각급 지도층의 실천적인 시범이 선행하지 않고선 한국사회의 미래는 어두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대 정부는 사회적 의식개혁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수많은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수도 없이 외쳐봤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사회지도층이 모범을 보이고 이를 국민들이 뒤따라 의식구조가 선진화, 성숙화돼야 정치와 정부개혁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지도층이 건실하고 층이 두꺼울수록 국가운영의 컨센서스가 쉽게 모아지고 정부와 지도자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높아지는 법입니다. 이럴때 진정한 국민적 의식개혁이 이뤄지고 신뢰사회가 구축되며 집단 생산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사회 지도층의 분열은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수'를 칭하는 집단과 '진보'를 표명하는 집단간 대립 양상도 나타나고 있는데요. 특히 경제정책 측면에서 사회주의 색채가 강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은데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경제발전은 합리주의의 소산입니다. 합리주의의 결여로 말미암아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었고 합리주의의 강점이 있기에 현재 시장경제체제가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수냐 진보냐는 관점보다는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양식으로 돌아가 합리주의에 기반한 국가및 경제 운영이 시급합니다. 이런 점에서 진보든 보수든 합리주의적 사고가 결여돼 있다는 점에서 요즘 돌아가는 상황은 우려할만 합니다" -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지정책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만 경제적 능력에 맞는 복지 확대보다는 정치적 필요에 의한 복지 확대는 경계해야 합니다. 복지 확대는 국민 누구나 선택하는 일이지만 경제적 능력이 뒤따르지 않을 경우 국민경제에 큰 부담이 됩니다. 스웨덴 등 북구국가의 역사적 경험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제적 능력을 넘어서는 복지 확대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경제적 능력에 맞는 복지 정책을 펴야 합니다. 우리는 1인당 국민 소득이 아직 선진국의 4분의 1 수준에도 못미치는 개도국입니다. 밤새워 일해도 선진국을 따라갈까 말까 합니다. 지금은 생산성을 높이는데 주력해야 할 때입니다" -미 테러사건은 세계화 물결에도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변혁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한국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은 세계사의 흐름에서 새로운 경제, 새로운 기업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경제로선 지금까지 세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개발연대시대로 투자가 곧바로 성장으로 연결되던 때였습니다. 또 한번은 IMF(국제통화기금) 위기로 IMF 관리경제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습니다. IMF 위기가 없었다면 구조조정의 결단은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거품경제가 그대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세번째는 바로 지금 고도정보화를 축으로 하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입니다. 다행히 한국은 IT(정보기술)산업에 있어서 선진국에 비해서도 손색 없을 만큼 강한 의욕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디지털 마인드로 무장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우리 나름의 강점을 접합시키고 국제사회에서 경쟁과 협력의 두 날을 무기로 계속 성장해나가야 합니다. 이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정리=강현철 기자 hckang@hankyung.com --------------------------------------------------------------- < 이현재 이사장 약력 > 1929년 충남 홍성 출신 53년 서울대 상대 졸업(경제학) 69년 서울대 대학원 박사(경제학) 61~88년 서울대학교 교수 81년~현재 학술원 회원 83~85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83~85년 서울대학교 총장 88년 2월~88년 12월 국무총리 89년 5월~95년 5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95년 11월~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96년 3월~현재 국민대학교 재단 이사장 96년 8월~2000년 학술원 회장 97년 6월~현재 호암재단 이사장 2001년~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사장 주요 저서 : '경제발전론' '자본시장과 주식분산' '경제성장과 국민소득구조 변동' '한국 경제론' '재정경제학'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