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분당신도시 구미동 18 일대는 천덕꾸러기 땅이었다. 토지소유자인 토지공사는 몇번이나 이 땅을 매각하려고 내놨지만 건설업체들이 외면했다. 뒤쪽으로 고압선과 도시고속화도로(분당~청담대교)가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당신도시내 목좋은 곳에도 노는 땅이 많은데 구태여 하자있는 땅을 매입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 96년 부동산개발업체인 신영의 정춘보(46) 사장은 이 땅을 보는 순간 무릎을 쳤다. '주거형 오피스텔'(시그마)을 짓기에 안성맞춤인 땅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시장 상황이 그랬다. 당시에는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서 주거용 오피스텔 분양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분양공고만 나면 투자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장사가 잘되자 건설사들은 분양가를 야금야금 올렸고 급기야 평당 8백만원대로 치솟았다. 투자자들은 서서히 가격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 사장은 이럴때 신도시에서 싼값으로 주거용 오피스텔을 분양하면 투자자들이 몰릴 것이란 생각을 했다. 저층으로 지어 아파트 분위기를 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게 그의 판단이었다. 다행히 땅의 매각 조건도 아주 좋았다. 매각 대금은 일시불이 아니라 분납으로 지불하게 돼 있었다. 정 사장은 8층짜리 4개동 1천94가구(20~59평형)의 오피스텔을 짓기로 결심했다. 정 사장의 판단을 놓고 건설업체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엉뚱하다는 것이었다. 오피스텔을 마치 아파트처럼 여러 동으로 나누어 1천가구 이상 짓는다는게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분양을 시작하자마자 오피스텔은 순식간에 다 팔려 버렸다. 정 사장의 예감이 보기좋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정 사장은 이를 계기로 일약 디벨로퍼(부동산개발업자)의 선두주자로 부상했고 시그마II에 이어 로얄팰리스(주상복합아파트) 로얄팰리스하우스빌(오피스텔) 시그마III(오피스텔) 체르니(아파트) 등을 잇달아 성공적으로 분양하면서 디벨로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 디벨로퍼란 땅매입, 상품기획, 설계(외주), 시공(외주), 판매, 사후관리를 총체적으로 담당하는 부동산개발업자를 일컫는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땅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다. 입지여건 주변수요 등을 분석, 가장 적합한 상품을 기획한다. 외주형태로 진행되는 설계, 시공 단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고객의 욕구를 반영한다. 이 과정에서 명당도 아무 쓸모없는 땅으로 변할 수 있고 천덕꾸러기 땅도 금싸라기 땅으로 변한다. 그래서 정 사장은 디벨로퍼를 '땅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사실 한국 부동산시장에서 디벨로퍼의 역사는 일천(日淺)하다. IMF 경제위기 이전까진 디벨로퍼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말뚝만 박으면 분양이 되던 시절이어서 누가 은행에서 돈을 빌려 땅을 많이 확보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이후 시장상황이 달라졌다.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위주로 시장여건이 바뀌었다. 참신한 아이디어나 상품개발 없이는 성공할 수 없게 됐다. 정 사장은 디벨로퍼로 성공하기 위해선 '현장 경험'이 많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 사장은 올 하반기에는 분양의 불모지로 전락한 용인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동백택지개발지구에서 '한국판 베벌리힐스'를 만든다. 시그마II에서 봤던 남다른 발상이 이번에도 적중할지 지켜볼 만하다. 조성근 기자 trut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