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에 헬런 켈러가 한국에 왔는데 금강산도 보여주고 가야금소리도 들려주었더니 그렇게 즐거워하더라는 말을 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는 운보 김기창.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청각마비는 이후 자신의 천형으로서 좌절과 비극적인 삶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야말로 천연기념물과 같이 한평생을 살아온 여유와 익살로 녹아 흘러 마치 움직이는 문화재처럼 언제나 걷잡을 수 없는 여백의 재치를 선사해 주었다.

만년의 운보는 눈물 없이는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그의 삶 마지막을 다시 한번 고통으로 일관하였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는 로비사건의 파문, 심혈을 기울여온 운향미술관의 폐쇄, 그토록 바라던 북한의 동생 기만과의 극적이고도 아쉬운 상봉 등은 그를 지켜보는 문화계인사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운보는 이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장애인들에게는 더 없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미술인들에게는 우리 전통의 진정한 현대적 구현이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남기고 갔다.

아마도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간 작가라는 기록에서도 그렇지만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실험에 대한 의식과 바보회화의 평가는 분명 우리 미술사의 한 지평을 열어 보인 독자적인 세계관이었다.

"이제 그만 어머니와 우향 곁으로 가고 싶어"를 연발하던 인간으로서의 운보.

장애를 극복함에 있어서는 베토벤이나 고야를 능가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예술가로서의 운보를 우리는 그만 떠나보내게 되었다.

고인께서는 부디 이 생에서 흩뿌렸던 비애의 조각들은 거두시고, 다 이루지 못했던 우향과의 행복을 누리시면서, 그 천진한 웃음과 해학의 미감으로 환생하소서.

최병식 경희대교수/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