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김희경(38·서울 면목동)씨는 얼마전 장롱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속옷을 꺼내 차곡차곡 챙겼다.

한 내의업체에서 실시하는 교환판매 행사에 들고 나가기 위해서다.

같은 상표의 새 속옷을 사면 팬티는 1장에 2천원,브래지어는 1개에 5천원씩 보상해 준다는 말에 입던 속옷을 모두 모았다.

중견기업체 이사인 류한식(52·서울 잠실동)씨는 올해는 연하장을 한장도 주문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단체주문을 받아 싸게 만들어 주지만 알아서 하겠다며 사양했다.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공짜 동영상 연하장''으로 대신하겠다는 계획에서다.

류씨는 최근에 바꾼 승용차도 중고시장에서 샀다.

또다시 어두운 불황의 그늘이 드리워지면서 이같은 ''자린고비''들이 급증하고 있다.

생선 한마리를 매달아 놓고 쳐다보는 것만으로 반찬을 삼았다는 우화 속의 주인공처럼 ''절약''으로 불황을 견뎌내겠다는 소박한 ''알뜰족''들이다.

주부들 뿐만이 아니다.

직장인들 사이에 ''내가 점심 값을 내겠다''며 호기를 부리는 사람은 볼 수 없다.

특별히 입맛이 없는 날을 제외하면 일단 구내식당 행이다.

어쩌다 ''외식''을 하더라도 ''먹자골목''의 허름한 밥집이면 족하다.

즐겨찾는 메뉴는 김치찌개나 백반 칼국수 등 주머니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들이다.

식사가 끝나면 으레 들르던 다방도 ''통과''다.

자판기에서 뽑아 먹으면 그만이다.

비즈니스맨들의 오찬 장소로 인기를 끌던 고급 한정식집은 파리를 날리고 있다.

반찬을 더 늘렸지만 빈방이 수두룩하고 커다란 방을 2∼3명이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재래시장의 경기는 날씨보다 더 춥다.

옷 반찬거리 과일 등 제대로 팔리는 게 없다.

백화점도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매장은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지만 중산층이나 서민용 상품 매출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잔뜩 기대를 걸었던 추동복 업계는 된서리를 맞았다.

중고품이 인기를 끄는 것도 ''실속파'' 증가에 따른 현상이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해져 할부금이 부담스러운 데다 기름값까지 올라 새차는 ''사치품''이 돼 버렸다.

더군다나 중고차 시장에 쏟아지는 매물도 엄청나게 늘었다.

금년에 출고된 대형 승용차도 수두룩하다.

자연히 중고차 값도 차종에 따라 3백만∼5백만원 정도 떨어졌다.

연말 성수기를 맞은 인쇄업계는 울상이다.

달력과 수첩 주문량이 최고 절반 가까이 줄어든 탓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달력 배포대상을 줄였다.

그나마 값이 나가는 호화로운 달력은 아예 사절이다.

알뜰구매 현상은 소비재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파트도 싼 것을 선호한다.

한동안 대형아파트가 잘 나가더니 요즘은 소형에서만 경쟁이 이뤄지고 중대형은 대부분 미달이다.

건설업체들은 이에맞춰 ''할인판매''에 나서고 있다.

분양가를 아예 10% 정도 깎아주거나 중도금 무이자 대출,고가 경품제공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입주자 모집 경쟁을 펴고 있다.

반면 알뜰용품의 수요는 늘어나는 추세다.

수도권의 연탄사용량은 지난 86년 이후 14년만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을 감당하지 못해서다.

장작 겸용 보일러 등 ''절약형''이어야 물건이 팔린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고려대 국제대학원 박인원 교수는 "미래에 대한 심리적 불안이 경제적 절제로 표출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다만 소비 위축이 지나치면 불황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시장이 어느정도는 돌아가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하면서 건전한 소비문화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