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은 한진그룹에 경사가 겹치는 달이다.

1일은 세계 하늘에 "태극"을 수 놓기 시작한 지 30주년 되는 날이었다.

대한항공으로선 "뜻을 세워" 새로운 천년을 맞는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오는 28일은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

자신의 지론이자 그룹 모토인 수송보국을 지켜온 조중훈 회장.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수송외길"을 걸어온 그가 이날 팔순을 맞는다.

"창업주에겐 2선이란 없다"고 강조해 온 조 회장.

그는 요즘도 서울 소공동 해운센터 빌딩 21층의 집무실로 출근해 중요한
업무들을 챙긴다.

"잡념없이 일에 매진하는 것"을 건강비결로 꼽을 만큼 아직도 정력적이다.

그룹 청사진을 그려 달라는 주문에 "21세기엔 세계 초일류 물류.정보그룹이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본사 최필규 산업1부장이 해운센터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대한항공 창사 30주년에 팔순도 맞으시는데...

겹경사를 축하드립니다.

요즘 건강은 어떻습니까.

<>조 회장 =그간 대한항공을 성원해주신 국민들께 감사드립니다.

나이 먹는 건 축하받을 일은 아닌 것 같고.

마음은 아직도 젊은 데 몸이 잘 안따라요.

잡념없이 일에 매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건강에는 딴 거 없어요.

사업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열심히 찾아다니면 건강도 따라오는 거지요.

대한항공 인수한 게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렀습니다.


-대한항공 인수 얘기좀 해주시지요.

우여곡절을 거쳤다는데.

<>조 회장 =68년 여름이었나, 갑작스럽게 청와대에서 불러요.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기간중 국적기로 해외 순방하는 게 꿈"
이라며 운을 떼더군요.

당시 항공수송은 국영 대한항공공사가 맡고 있었는데 경영이 부실했습니다.

한해 적자만 1억원 가량 났거든요.

그래서 공사측의 인수요청을 정중히 거절해 오던 터였는데, 대통령이
"국적기는 하늘의 영토 1번지요, 국적기 가는 곳에 그나라 국력이 뻗치는 것"
이라며 간곡하게 인수요청을 하더군요.

어디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무척 부담스러웠겠습니다.

<>조 회장 =물론입니다.

아무리 주판알을 굴려도 계산이 안 나왔어요.

분단된 반도국이어서 노선망은 제한돼 있지, 항공기는 낡고 기술인력은
부족하지, 사업 전망이 밝을 리가 없었지요.

나는 청년시절부터 대규모 무역.수송업을 해보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도
당분간 접어둘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수당시 항공사 규모는 어땠습니까.

<>조 회장 =비행기는 DC 9 제트기 1대에 프로펠러기 7대가 전부였어요.

국내 8개에 일본 노선 3개였으니 노선이랄 것도 없었고, 매출액은 17억원에
불과했지요.

하여튼 동남아 11개 항공사 중에서 꼴찌였습니다.

-지금은 세계속의 대한항공 아닙니까.

<>조 회장 =그렇지요.

세계 시장에서 화물부문은 2위, 여객부문은 13위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대한항공 키우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부심도 큽니다.

새벽마다 공항에 나가 정비현장을 확인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그러자니 기술도 늘더군요.

어느정도 지나선 비행기 엔진소리만으로 이상여부를 알아낼 정도가 됩디다.

-그룹은 올해 54주년이 되나요.

지난해엔 IMF사태로 꽤 어려우셨을텐데요.

<>조 회장 =사업 시작한 게 지난 45년이었으니까 반세기를 벌써 넘겼군요.

지난해는 워낙 힘든 때라 부담 줄이려고 비행기를 판 뒤 임차해서 쓰기까지
했는데.

원.달러 환율이 안정된 게 여간 다행이 아니었어요.

그동안 수송 분야 한우물만 파면서 갖춘 국제 경쟁력도 도움이 됐고요.

-지난해 그룹 성적표는 어떻습니까.

<>조 회장 =모든 계열사가 흑자를 냈어요.

기분이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흑자 났는지는 결산이 끝나보면 드러날 겁니다.

-그룹 성장기반은 월남진출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조 회장 =맞습니다.

국군 월남 파병이 65년 1월에 결정됐는데...

그해 12월 동남아 순방길에 월남에 들렀더니 군수물자를 수송하면 승산이
있겠다는 판단이 서더군요.

-월남에선 얼마나 이익을 보았습니까.

<>조 회장 =66년부터 71년까지 1억5천만달러를 벌었습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1백25달러에서 3백달러였으니 엄청난 액수지요.

항공 해운에 몽땅 투자했습니다.

그게 그룹 기반이 됐고 국내 수송 물류산업이 발전하는 토대도 됐어요.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가장 고비라고 느낀 때는 언제였습니까.

<>조 회장 =73년 1차 오일쇼크때 였는데...

회사마저 잘못되겠다는 걱정까지 들더군요.

다행히 해외판매망을 늘리고 장거리 노선을 개발한 전략이 맞아 떨어져
원가상승분을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중동지역에 타이밍 맞춰 뛰어 들었던 것도 주효했고.

75년엔 흑자로 돌아섰어요.

"기회란게 스스로 개척하고 노력할 때 만들어 진다"는 걸 이때 깨달았습니다

-수송외길을 걸어오면서 보람도 컸을텐데.

<>조 회장 =수송이란 사람 핏줄같은 겁니다.

국가 기간산업이지요.

맨손으로 수송산업을 키워 국가경제를 발전시켰으니 보람이자 최대의
영광입니다.

-올해 신년사에서 수송물류, 건설.중공업, 금융.서비스에 주력하겠다고
했는데.

<>조 회장 =경영자원을 수송.물류에 집중시킬 작정입니다.

다른 사업군들은 이들을 지원하는 체제로 재편할 거고요.

구조조정도 이런 방향으로 이뤄질 겁니다.

(그룹관계자는 계열사 통폐합의 경우 거래선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해야
한다며 조만간 구조조정 중간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영 스타일에 대해 보수적이란 평가가 많습니다.

<>조 회장 =남이 닦아 놓은 터에 안뛰어 들고 경험없는 일엔 손도 안댔어요.

게다가 신규사업에 진출하자는 건의도 대부분 내쳤고.

그러니 그런 평가가 나올만도 해요.

하지만 보수적인건 아닙니다.

시류를 안탔을 뿐이지요.

-사업성과 무관하게 관심두신 분야도 있잖습니까.

인재양성 같은...

<>조 회장 =종신지계 막여수인이란 말이 있어요.

살면서 가장 뜻있는 사업이 인재 키우기란 뜻인데, 기업가로선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방편이기도 해요.

나는 "기업은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사람 키우는데 인색해선 안됩니다.

(한진그룹은 인하학원 정석학원을 운영중이다.

88년 사내교육기관으로 세운 한진산업대학은 교육부에 법인설립을 요청해
놓고 있다.

인가가 나면 국내 최초 기업내 정규대학인 한진대학이 탄생한다)

-사은하겠다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업적으로도 남을 거구요.

<>조 회장 =그런 거 기대하지 않아요.

찬사받자고 시작한 게 아닌데...

업적이랄 것도 없고.

다만 민항을 세계적인 항공사로 키운데 대해선 스스로 생각해도
자랑스러워요.

-교육문제가 나온 김에 최근의 한자병용 논쟁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조 회장 =정치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데.

그러나 수백년이상 쓰던 한자를 단번에 퇴장시킨 건 너무했다고 봐요.

동남아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자 모르면 답답해요.

우리나라에 온 동남아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장일 겁니다.

-독특한 한자 교습법을 만드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조 회장 =말하자면 화상교육을 뜻하는 겁니다.

운영중인 학교 교실마다 TV를 설치하고 하루 한자 한자씩을 여기에 비추라고
했어요.

뜻도 설명해 주고 써 보게도 하고.

알아두면 손해날 건 없으니까.

-지난해 세운 제주도 정석비행장에 각별한 관심을 쏟으신다면서요.

<>조 회장 =72년 정부요청으로 매입한 황무지를 개간해 세웠으니까 20년
넘게 걸린 셈이지요.

항공회사들 희망은 국제규모 공항을 갖는 겁니다.

조종사 훈련시키는 데 꼭 필요하거든.

우선은 조종사 양성에 쓸거고, 제주공항에 문제가 생기면 대체공항으로도
활용할 겁니다.

그만큼 넓어요.

관광지 제주의 제2관문이 되도록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항공박물관도 곧 문을 연다면서요.

<>조 회장 =정석비행장 근처에 들어섭니다.

대한항공이 처음 도입한 점보기를 지난해 보잉사에 팔았는데 무상
기증받았어요.

박물관에 전시하려고요.

모양새를 갖춰서 늦어도 5월 쯤이면 개장할 겁니다.


-제주에 또다른 명소가 되겠습니다.

<>조 회장 =물론이지요.

비행장과 박물관은 제주시와 서귀포시 중간쯤에 위치한 표선지역이라는
곳에 들어서는데, 제주관광에 핵심역할을 하면서 지역경제에 보탬을 줄
겁니다.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의 외자유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조 회장 =미국 영국을 다니면서 노력 많이 했어요.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할텐데.

사실 비행장만 만들어선 아무 의미가 없지요.

제대로 운영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첨단공항을 운영해 본 업체를 불러야 합니다.

입을 사람도 없는 양복은 만들어 뭐 합니까.

-항공단일법인에는 대한항공만 빠졌습니다.

<>조 회장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기업도 주관과 목표가 뚜렷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봐요.

단일법인의 사업계획과 비전만 제시된다면 참여못할 이유가 없지요.

-민간외교관 역할도 훌륭하게 해 오셨습니다.

외국훈장도 많이 받으셨지요.

<>조 회장 =민간외교도 외교고 애국하는 길입니다.

애국에 민관이 따로 있겠냐는 생각으로 활동했습니다.

프랑스와의 관계는 에어버스 도입때 한.불민간경협위원장을 맡으면서
시작됐는데...

20년 이상 되니까 웬만한 고위층은 다 아는 편입니다.

한.불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된 것 같고.

독일과는 해운문제로 민간외교를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훈장도 주대요.

(그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델란드 독일에서 8개의 훈장을 받았다)

-애국심을 많이 얘기하십니다.

<>조 회장 ="사업은 예술"입니다.

예술작품이 그렇듯 기업에도 기업인의 혼이 담겨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성장할 것이고 직원이나 국민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거지요.

기업도 애국심을 바탕으로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부암동 저택 대문가에 문간방을 별도로 만들어서 기거중이다.

자녀가 모두 출가했는데 큰집에서 살아봐야 국가적 낭비라는 이유에서다)

-IMF사태로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조 회장 =남이 잘된다고 문어발식으로 뻗치면 안됩니다.

IMF사태도 결국 무리한 사업확장에서 비롯된 거예요.

남들이 안하는 걸 개척해서 전문성을 쌓아야 기업이 살고 직원이 살고
나라가 사는 겁니다.

언론도 클래식한 멜로디를 들려주는 창구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사회 각 부문이 하모니를 이루면 나라는 저절로 발전합니다.

< 정리 = 박기호 기자 khpark@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