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충정로에 있는 경기대 경영학과 K교수 연구실.

신문을 뒤적이던 K교수는 "잘 나가고 있는" 섬유업체 기사를 보고 무턱대고
전화를 걸어 L사장을 만나자고 했다.

L사장은 시간을 내주었다.

"사람은 겉보기로는 판단하기 힘듭디다. 직장을 얻으면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친구들 때문에 회사가 어려워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K교수가 찾아온 의도를 알아채고는 얘기도 꺼내기 전에 정중히 거절
했다.

K교수는 연구실로 돌아와 다시 신문을 펴들었다.

무역회사를 하나 골라 총무부장과 통화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직원 채용계획도 없고 내게는 권한도 없으니 사장과
직접 통화하시죠"라는 답변뿐이었다.

"구걸하는 것도 아닌데...".

K교수는 자존심이 상했다.

역시 아무런 연고가 없이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동문주소록을 뒤졌다.

모 건설회사 사장을 찾아내 회사 근처에서 만났다.

동문이라 그런지 친절히 대해주었지만 정작 후배 취업문제에 대해서는
"노력하겠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어려운 회사사정을 듣고 나니 오히려 찾아온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벌써 10여개 업체를 방문하고 수십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
소득이 없다.

캠퍼스가 취업 전쟁터로 바뀌고 있다.

교수가 제자 취업에 발벗고 나서는 일은 예사다.

교직원과 총장까지 뛰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

기업을 소유.운영하는 동문과 학부모에게 매달리는 일은 다반사.

취업난은 이제 학생들만의 고통이 아니라 총장 교수 교직원이 함께 짊어져야
할 "공통의 짐"이 되고 있다.

연세대는 김우식 대외부총장이 취업전선의 "선봉"을 맡고 있다.

김부총장은 얼마전 동문이 소유하거나 운영하는 기업 1만개 가운데 채용
능력이 있는 1천개를 골라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1회사 1후배 채용운동"을 펼치자는 것.

많은 기업에서 채용응답이 오는 등 반응이 의외로 좋아 채용운동 대상을
기업을 소유.운영하는 학부모에게까지 넓히기로 했다.

동국대는 졸업예정자들의 신상을 상세하게 기록한 전자이력서(CD롬)를 제작,
기업체에 나눠주고 있다.

전자이력서에는 학생들의 이력 가족사항 자기소개서 봉사활동경력 성격
장래포부 등이 입력돼 있다.

건국대의 경우 맹원재 총장이 1천여개의 동문기업에 후배채용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냈다.

건국대는 또 졸업예정자들의 인적사항과 개별면담내용 등을 담은 "취업카드"
를 동문기업에 제공하고 있다.

서울여대는 2학기부터 취업 항목을 교수 평가기준에 포함, 교수들에게
"압력"을 넣고 있다.

학교측은 "교수가 취업정보를 제공해 준 정도와 기업체를 방문한 횟수,
제자를 몇명 취업시켰는지 등을 평가기준으로 삼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예 일단 채용만 하면 학교에서 월급을 주겠다는 대학도 있다.

전남대는 졸업예정자를 인턴사원으로 채용할 경우 학교에서 매달 40만원씩
두달간 월급을 책임지는 "역인턴 사원제"를 기업에 제의했다.

기업들이 학생들을 써본 뒤 채용여부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 이건호 기자 leek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