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회장 일가의 북한 7박8일"은 방북단 15명의 증언을 토대로 본사 기자가
재구성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순영 성우 명예회장,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정상영 KCC 회장 등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들을 지칭합니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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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우리 일정은 실무단과 완전히 달랐다.

실무단은 내내 평양에서 아태평화위원회 민족경제협력연합회 등과 실무
협의를 해야 했지만 우리는 묘향산 구경에 나설 수 있었다.

묘향산 나들이에는 전날 모란봉초대소로 우리를 찾아온 고향 친척들도
함께 했다.

묘향산은 금강산에는 못미친다고 한다지만 남북한을 합쳐도 몇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산이다.

우람한 나무들이며 깎아지른듯한 산세가 절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묘향산초대소 소속 여직원들이 나와 몸이 불편한 순영 형님을 부축했고
점심도 마련해줬다.

점심을 먹으면서는 낮술에 웬간히 취해 여직원들과 어울려 노래도 여러 곡
불렀다.

우리는 이곳에서 보현사 등 유적지를 돌아봤고 국제친선전람관을 관람했다.

국제친선전람관은 각국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보낸 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갔다온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묘향산이 특별히 머리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다음날 가기로 돼 있는 고향 통천의 모습이 어른거려 눈과 머리가 따로
놀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다음날 우리 일행은 평양에서 70인승 여객기를 타고 원산으로 이동했다.

고향 통천으로 가는 길목이다.

원산에 대해 얘기할게 있다.

이날 우리 일행은 원산 갈마비행장에 내리자 마자 곧바로 통천으로 향했지만
이틀 뒤인 21일 다시 이곳에 와서 6.4차량종합기업소와 조선소를 들를 기회가
있었다.

원산은 생각보다는 훨씬 작은 도시다.

하지만 이곳은 북한에 중요한 산업시설들이 꽤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원산조선소에 들렀을 때 이야기다.

우리가 공장에 들어갔을 때는 설비가 돌아갔는데 우리가 공장을 나오자
마자 바로 전기를 차단해버렸다.

전기사정이 엉망이라는 얘기다.

현대정공이 화차 임가공사업을 하고 있는 6.4차량종합기업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안내원들에게 "남한에 전기를 달라고 하지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화를 냈다.

"보내달라면 보내주겠느냐,오히려 민족적인 차원에서 알아서 보내줘야
하는게 아니냐"는게 이쪽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어쨌든 현대가 이곳에 와서 사업을 벌이더라도 발전소를 짓기 전에는
발전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날 갈마비행장에 내린 우리 일행은 배를 타고 고향을 찾았다.

실무단 일행은 차를 타고 갔다.

북측은 우리를 위해 30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쾌속 요트를 마련해 줬다.

사실 형님(정주영 명예회장)은 배를 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도 이날 굳이 배를 타고 간 것은 김용순 위원장 등이 직접 나와 "높은
분"이 특별히 내준 배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이날 쾌속선 위에서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의 메시지를 형님께
전달했다.

"이번엔 바빠서 못만나지만 9월에 와서 꼭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명사십리는 원산 갈마반도의 일부를 지칭하는 지명이다.

그러나 원산에서 통천으로 가는 2백리 해변 전체가 "명사"다.

그야말로 절경이다.

우리는 "명사2백리"라며 감탄했다.

배가 도착한 곳은 통천인근의 고저라는 항구다.

고저에서 승용차에 나눠탄 우리 일행은 고향집으로 향했다.

안내원은 아산리라는 행정구역이 없어졌다고 했다.

옆마을과 합쳐지면서 노상리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아산리는 이제 형님의 호(아산)와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에만 남게 된
셈이다.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도 섭섭했지만 더 서운한 것은 고향의 모습
자체가 전혀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달리던 차안에서 안내원이 "바로 저기가 생가"라고 했지만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여전히 무성한 감나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 정리=김정호 기자 jhki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