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7박8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치고 23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정 명예회장을 비롯한 방북단 15명의 이야기와 북한 관영 언론의 보도내용
을 토대로 방북기를 구성해 본다.

이 글에서 "우리"는 정순영 정세영 정상영 명예회장 등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들을 지칭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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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뻔 했다.

우리가 태어나 자랐던 고향 아산리-.

고향집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앞마당의 감나무 다섯 그루만이 몇십년 나이를 더 먹은채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사이 반백년, 우리 형제는 감나무에 시선을 고정한채 말없이 머리속에
옛일 그렸다.

10년만에 다시 고향집을 찾는 형님(정주영 명예회장)도 감회가 새롭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친척들은 대뜸 오열을 터뜨렸다.

하지만 누가 누군지를 금방 알 수가 없었다.

그토록 그립던 고향 친척들이 눈앞에 있는데 얼떨떨한 기분부터 드는건
어쩐 일인지..

그래도 기억이란 신통한 것이다.

동구길과 마을, 남산..

하나 둘 씩 50년전 아산리가 눈앞에 펼쳐지질 않는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살때 이곳을 떠난 몽구와 난생처음 고향을 찾은 몽헌이도 뒤척이기는
마찬가지였고.

형님은 고향을 떠나기전 집 앞뜰에 손수 감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고향집에 마지막 정표를 영원히 남기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으리라.

언젠가 손주들도 고향집을 찾을 날이 올 것이다.

그땐 할아버지가 심은 감나무가 유독 돋보이는 그 집을 찾으라고 얘기해
줘야겠다.

형님은 연초부터 고향에 갈 것이라는 언질을 줬지만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나 정작 방북날짜를 받아든 지난 11일에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당황했다.

50년동안 꿈에 그리던 일이지 않은가.

방북날 아침 형님은 청운동 집을 찾아간 기자들에게 돼지꿈을 꿨다고
했지만 우리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판문점은 더없이 가까웠다.

계동 사옥을 출발해 소를 실은 트럭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서는데 걸린
시간은 번거로운 절차에도 고작 3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기다려온 50년이 안타까울 뿐이다.

남과 북은 10cm의 파란색줄이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통과한 중립국감독위 회담장 내부에 그어진 군사분계선이다.

고작 10cm의 파란색줄이 민족의 허리를 동강내고 있는 것이다.

송호경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관계자들이
여럿 마중을 나왔다.

모두 우리 일행이 반갑다는 표정들이었다.

송 부위원장은 "정 선생이 오신 것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며 형님의 손을
꼭 잡았다.

하루 먼저 입북한 박세용사장 이익치사장 등 선발대도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15일 북경을 거쳐 평양에 도착한 이들은 개성에서 하룻밤을 지낸뒤 새벽
같이 판문점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벤츠 승용차에 나눠 타고 북으로 향했다.

"72시간 다리"를 지나면서 판문점도 이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판문점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도로 주변은 그런대로 깨끗이 정돈
돼 있었다.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늘 접해 왔지만 평양을 향해
달리는 길가에서는 그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헐벗은 산과 덜자란 듯한 농작물이 북한의 실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전해주는 듯했다.

개성을 지나 평양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조금 지났을 때다.

모란봉초대소에 여장을 풀었다.

짐을 풀기가 무섭게 아.태평화위 관계자들은 오후에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용순위원장과 접견일정이 잡혀 있으며 저녁에는 목란관에서 위원회 주최의
환영 연회가 있다고 알려왔다.

7박8일간 방북 공식일정의 시작이었다.

< 정리=김정호 기자 jhki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