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전망 확보 ]

월드컵 축구 멕시코와 결전을 앞둔 지난주.

김병훈(29)씨는 한국과 멕시코 가운데 누가 이기는가를 놓고 직장동료와
내기를 해야 했다.

호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참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직장분위기를 해칠까봐
억지로 낀 것.

한국이 이기는 쪽에 "거금" 3만원을 건 김씨는 곧바로 평소 자주 만나던
대학동창들과 똑같은 내기를 했다.

이번에는 한국이 지는 쪽에 2만원을 걸었다.

결국 한국이 경기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3만원은 날렸지만 2만원을 받았다.

각각의 내기에서 모두 이기는 쪽에 걸었다면 투자금액(5만원)을 모두
날렸을 것이다.

둘다 지는 쪽에 걸었다면 "따블"을 받았겠지만 위험한 짓임에 분명하다.

"안전장치"를 마련한 덕분에 김씨는 손실을 1만원으로 줄일 수 있었다.

혹시라도 닥쳐올지 모를 불행에 대비하는 것.

IMF체제가 던져준 교훈중 하나다.

세상이 뒤숭숭해질수록 내 주변에 불행한 일이 생길 확률이 더욱 높아지는
법이다.

언제 직장을 그만두라 할지 모른다.

대출금을 끼고 사놓은 아파트가 폭락해서 빚더미에 앉을 수도 있다.

국가와 직장이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니 스스로의 안전망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나와 내 가족을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

돈을 모으는 것도 좋고 실력을 쌓는 것도 괜찮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행에 대비한 조치를 미리 마련해야 한다.

든든한 안전판 하나만 있다면,모든 위험을 나름대로 분산시킬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김씨의 경우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위험을 분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기업 차장인 조준연(39)씨는 최근 직장인 보장보험에 가입했다.

봉급삭감으로 살림살이 전반이 빠듯해졌지만 보험료 지출은 늘었다.

그는 평소 보험은 생명보험 하나만 가입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다.

IMF체제는 이런 생각을 바꿔 놨다.

자기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다.

그가 가입한 직장인보험은 실직하면 일정 기간 생계비를 지급하도록
설계돼 있다.

부상하거나 사망하더라도 보험금을 받는다.

당장 굶을 걱정은 안해도 된다.

금융기관에 종사하는 고은석(35)과장은 다락방에 처박아둔 국제회계관련
책자를 다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다니는 은행이 언제 미국에 팔릴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당장 급한 것은 아니지만 안전장치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고 과장으로
하여금 책을 잡게 만들었다.

최근 각종 자격증학원이나 어학원 수강생이 늘어난 것도 안전판을 마련
하겠다는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평소 챙기지 않던 친척과 친구들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일.

어려울때 힘이 돼줄 수 있는 사람들은 친지뿐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모 아니면 도"(all or nothing)라는 베팅은 IMF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살아가는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모든 분야에서 위험을 분산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동남아국가는 실업률이 6%를 넘어서면 소요사태가 발생한다.

반면 실업률이 10%를 넘는 유럽국가는 큰 탈이 없다.

왜일까.

바로 사회적 안전망이 완비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사회적 안전망이 미비돼 있다는 점에서 동남아국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스스로 안전망을 만들 수밖에 없다.

증권거래소 홍인기 이사장은 "장밋빛 미래는 스스로 준비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지적한다.

IMF는 라이프스타일만 바꾼게 아니다.

생활태도도 합리적으로 바꿔 놓고 있다.

< 정태웅 기자 redae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