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구식 잣대 ]

"접대 잘한 덕에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던 심형석(가명.39)씨의 넋두리다.

영업팀장이던 심씨가 알고지내던 모부처 사무관과 "가볍게" 한잔한 것은
지난해 12월.

술값 등으로 50여만원이 나와 법인카드로 그었다.

다음날 영수증은 임원선을 통과해 쉽게 접대비로 처리됐다.

한국인인 지사장도 별말없이 사인했다.

탈이 난 건 1주일 후였다.

미국 본사가 감사팀을 급파한 것이다.

"어떤 목적으로 접대비를 썼는지" "꼭 필요했는지" 집중 추궁을 당했다.

로비가 아닌이상 접대는 "차한잔"정도라는게 본사 감사팀의 지적이었다.

"한국식 접대"를 이해시키려 애썼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이 일로 심씨는 해고되고 말았다.

임원과 사장도 한칼에 날아갔다.

심씨는 "이 일로 외국기업의 경영 잣대가 우리기업과 얼마나 다른지
절감했다"고 털어놨다.

이들 세 사람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건 "글로벌 스탠더드"를 익히지
못한 탓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합리성에 기초한 서구식 잣대다.

요즘같은 미국 독주시대인 "글로벌 스탠더드=아메리칸 스탠더드"다.

IMF관리체제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사회 구석구석에 전파시키고 있다.

기업은 물론 개인의 삶에도 그렇다.

특히 기업엔 그 전파속도가 빠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연봉제다.

30대그룹 계열사가운데 연봉제 틀을 도입하지 않은데가 거의 없을 정도다.

능력만큼 또 일한만큼 받는다는 기준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국제회계기준을 따르는 것도 한 예다.

영업에도 세계 기준이 적용된다.

센티미터와 킬로그램만 써선 곤란한 시대가 됐다.

인치나 파운드를 함께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신제품 개발 때 한국 사람 취향만 감안해선 망하기 딱 좋다.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의 김완문 본부장은 "제품을 디자인할 때 세계시장에
나온 경쟁품 수준을 감안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말한다.

내수시장이 얼어붙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은행들이 혈안이 돼있는 BIS비율(국제결제은행기준 자기자본비율) 맞추기도
글로벌 스탠더드의 하나다.

심지어 주식시장에서는 "글로벌 스탠더드주"가 "자산주"나 "M&A(기업매수
합병)주"처럼 한 테마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직장생활에도 스며들고 있다.

연공서열식 상하관계가 약해지고 파트너란 인식이 커지고 있다.

회식자리에선 그 징후가 잘 보인다.

"능력껏 모아봅시다" 부서회식때 흔히 들을 수 있게된 말이다.

점심값을 나눠내자는 소리다.

딱 잘라 자기 먹은 것만 내는 "더치 페이"는 아직 없다.

하지만 점심값 내기가 상급자의 몫이었던 옛날과는 사뭇 다르다.

상급자의 권위도 그만큼 떨어졌다.

개인의 의식도 적잖게 영향받고 있다.

체면과 이념을 중시하던 것이 실리를 으뜸으로 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합리주의가 뿌리내리는 조짐이다.

롯데호텔 양식당에서 견습웨이터로 새 삶을 시작한 전 삼미그룹 부회장
서상록씨의 경우는 직업에 대한 의식변화를 실감케 해준다.

이처럼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가 확산되면서 지미, 친미세력의 영향력이
훨씬 커졌다.

미국을 동경하는 심리도 강해졌다.

소비자들은 "메이드인 유에스에이"에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신뢰를 보낸다.

우수 학생 대부분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상영되는 영화의 태반은 헐리우드물이다.

고려시대에 몽골 풍습이 상류층에 유행한 적이 있었다.

"몽골양"이었다.

그 후에도 강대국의 풍속이 유행한 경우는 많았다.

그러나 그 때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영향에 그쳤다는 점이 지금과 다르다.

강대국 기준을 받아들이는게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일을 그 장점을 취해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 김용준 기자 dialec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