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파괴범 ]]

최근 활개치는 "가정파괴범"이 수많은 가정을 흔들고 있다.

가정을 꾸리려한 젊은이들마저 갈라놓고 있다.

범인의 실체는 뚜렷하지 않다.

붙잡아 단죄할 수도, 벌을 줄 사람도 없다.

피해자만 늘어날 뿐이다.

범인은 바로 IMF다.

가정주부 김현수(46)씨는 IMF로 인한 피해를 눈물로 호소한다.

지난 1월 남편이 경영하던 중소 가구회사가 부도란 직격탄을 맞았다.

흑자부도를 비관한 남편은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폭음은 물론 김씨와 아이들에게 폭행을 일삼았다.

생활도 어려운 마당에 가정폭력마저 심해지자 김씨는 법원에 이혼청구소송을
내고야 말았다.

김씨와는 달리 능력을 잃은 남편에게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한국 남성의 전화"(652-0456) 이옥 상담사는 "작년말이후 아내가 대화를
기피하고 밥을 차려주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남편들 전화가 부쩍 늘었다"고
밝혔다.

아내의 갑작스런 가출이나 이혼 요구, 혹은 외도를 일삼는다는 하소연이
대부분.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 향상되면서 중년에 갈라서는 "정년이혼"이 늘기는
했지만 요즘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올들어 3월까지 서울가정법원에 합의이혼을 신청한 부부는 8천9백70쌍.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1%나 늘어난 수치다.

기성세대만이 문제가 아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와 예비부부들도 고통받기는 마찬가지.

지난 5월 결혼한 신태원(32).정정원(27)씨 부부는 당초 생각을 바꿔
맞벌이를 계속하기로 했다.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깎인 봉급으로는 전세금 대출이자 갚기도 벅차다.

분유값 기저귀값은 생각할 겨를도 없다.

정씨는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쫓겨날까봐 아직까지 직장에
결혼사실을 숨기고 있다.

맞벌이가 과거 희망사항이었다면 이제는 결혼의 필수조건이다.

아이를 낳지 않고 둘이 벌어 즐긴다는 "딩크(DINK : Double Income,
No Kid)족".

예전에는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강제사항으로 바뀌었다.

이들 부부는 그래도 다행이다.

지난 4월초 결혼예정이던 신씨의 친구는 실업자가 되면서 신부측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파혼당했다.

그 친구는 IMF 위력앞에서 "사랑만이 전부는 아니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껴야했다.

이뿐만 아니다.

신분불안을 느낀 대다수 직장인들은 늦게까지 자리를 지켜야한다.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잘린 동료의 일도 떠맡아야 한다.

지방 발령을 받더라도 항변하기 어렵다.

자연 가정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집이란 한밤중에 잠시 들렀다가 아침이면 눈비비고 나가는
"하숙집"에 불과하다.

도대체 가정이 무엇인지 의문조차 든다.

물론 IMF는 가정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순기능역할도 부분적으로 하고 있긴
하다.

많은 가정이 흔들리고 있지만 일부가정은 오히려 화목해졌다.

언제 이혼을 요구당할지 두려운 남편들은 부인들에게 더 잘 대해준다.

주중에는 직장에 매달려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가족과 지낸다.

자신을 지켜줄 최후의 안식처는 가정밖에 없다는 인식이 남편들 사이에
빠르게 번지고 있는 것.

아내들도 위축된 남편 기살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처럼 IMF체제는 가정을 흔드는 동시에 가정의 소중함을 더국 절감케하는
상반된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런 와중에 우리의 무게중심은 점차 "직장중심"에서 "가족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평생직장"은 없지만 "평생가정"은 있기 때문이다.

< 정태웅 기자 redae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