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입구에 있는 등산화판매 및 대여점 ''관악산등산화''.

평일 아침에도 이곳에선 넥타이를 맨 중년 남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IMF한파속에서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다.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아직 해고소식을 전하지도 못하고 아침마다 출근하는
척 하는 이들.

하지만 집을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이 발길 닿는대로 오다보면 어느새 등산로앞이다.

이들은 이 곳에서 양복을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산에 오른다.

후회와 한탄, 분노와 서글픔을 곱씹으면서.

IMF가 직장인들을 산으로 출퇴근시키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이상한 손님들도 다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낯도 익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다보니 실직한 가장들이더군요"

가게주인 강현순(53)씨의 말이다.

강씨는 지난해 중반부터 이같은 손님들이 오기 시작, 12월이후 그 수가
크게 불어났다고 말한다.

많을 때는 하루에 10여명씩 찾을 때도 있다.

이들의 특징은 아침 9시께 나와 오후 5시까지 산행을 하는 것.

대개 소주를 한병씩 들고 산에 오른다.

처음에는 2천~3천원을 내고 하루 단위로 등산복 등을 빌리다가
단골손님(?)이 되면 아예 가장 싼 등산복과 등산화를 구입해 맡겨놓고
다닌다.

강씨는 자주 찾는 손님들과는 친해져 서로 "형 아우"하는 사이가 됐다.

커피한잔씩을 대접하며 인생고민을 같이 나누기도 한다.

"실직한 가장들이라 대부분 기가 죽어있어요.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경험을 이야기해주기도 하죠"

강씨의 말이다.

날씨가 나빠 산행이 어려울 때는 이곳에 나온 사람들끼리 바둑을 두거나
생활정보를 서로 나누며 소일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실직가장들의 "보금자리"가 된 셈이다.

관악산아래 이같은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찾아오는 실직자
들이 꽤 늘었다.

최근에는 사람을 뽑는 직장소개서가 오기도 한다.

실직자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들은 발빠른 중소기업에서 구인광고전단이나
명함 등을 보내오는 것이다.

얼마전에는 이곳 단골이던 김선생이라고 불리던 48세의 대기업부장출신이
재취업을 하는 경사가 나기도 했다.

강씨는 "빨리 경기가 좋아져 평일에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산에 오르는
가장들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김준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