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 불황이 계속되면서 돈이 있으면서도 빚을 갚지 않는 배짱
채무자가 늘고 있다.

서울시 강동구 명일동에서 가구도매점을 하는 이정철(40)씨는 지난달
물품대금 4천만원을 갚지 않고 있는 거래업자 장모씨를 상대로 재산명시
신청을 서울지법 동부지원에 냈다.

이씨는 장씨를 상대로 대금청구소송을 내 이미 승소판결을 받은 상태.

그러나 장씨가 돈이 없다며 막무가내로 버티자 재산상태를 공개토록
하는 재산명시신청을 다시 낸 것이다.

다른 거래처 사람으로부터 장씨가 경기도 광주일대에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장씨는 "그 땅은 아내가 신혼초부터 저축해 마련한
것으로 자신에게 처분권이 없다"며 버텼다.

형사처벌도 감수하겠다는 "협박"도 곁들였다.

이씨는 현재 돈을 받기를 사실상 포기했다.

서류상 자신의 명의로 재산이 등록돼있지 않으면 돈을 갚지 않더라도
처벌하기가 어려운 법의 허점을 이용해 가족명의로 재산을 도피시킨 뒤
빚을 갚지 않는 악성 채무자의 전형적인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중소기업사장들중에는 재산을 은닉시킨뒤 고의로 부도를 내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옛날 직장동료나 친척등으로부터 보증을 받고 은행에서
돈을 빌린 뒤 막상 사업에 실패하면 돈이 없다고 발뺌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른바 친분을 이용한 버티기 작전인 셈이다.

빌려준 사람도 뻔히 아는 처지에 얼굴을 붉힐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러나 양측의 다툼은 결국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따라 법원에 접수되는 민사소송건수는 지난 2~3년부터 매년 꾸준히
증가해 서울지법의 경우 판사 1명이 맡고 있는 사건이 평균 1백50여건에
이르고 있다.

이들중 상당수는 부도로 물건값을 받지 못한 업자들이 대리점을 상대로
낸 물품대금 반환청구소송이나 물건이 안팔려 점포세를 내지 못한
세입자들을 상대로 한 점포명도소송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재산명시신청은 7천4백여건으로 95년에
비해 35%가 늘었다.

올해의 경우 지난 6월까지 재산명시신청건수는 4천8백84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2%가 증가했다.

서울지법 여훈구 판사는 "이러한 사건들은 당사자에게 소송사실을
알려도 재판날짜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강제집행을
하더라도 실제 피고인명의의 재산이 얼마되지 않아 채권회수는 극히 미미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극심한 불황은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하는 사업가들의 정신까지도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불황은 우리사회를 더욱 불신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 이심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