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상의 퇴직금 우선변제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결정은 퇴직금운영
방식뿐만 아니라 기업금융제도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전망이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저당권을 근본으로 한 현재의 기업금융제도하에서
퇴직금에 대한 과다부담은 결국 기업의 금융압박을 가속시킨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퇴직금의 경우 총액에 대한 아무런 제한도 없고 공시방법도 없는 상황에서
회사가 부도날 경우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에게 예측할 수 없는 손해를 입힐
수 있는 만큼 이는 헌법상의 재산권 보장원칙에 위배된다고 본 것이다.

현행 기업금융제도하에서 금융기관의 유일한 채권회수방법은 담보권의
실행밖에 없으며 총액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퇴직금 부담은 담보
물권제도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게 재판부의 결론이었다.

즉 퇴직금이 늘어날수록 금융기관의 담보권가치는 급격히 감소해 금융기관
이 대출을 기피하는 등 기업금융제도를 더 위축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 관계자는 "도산위기에 처한 기업일수록 자금이 필요한데도 퇴직금
부담으로 인해 금융기관이 오히려 대출 자체를 기피하는 기현상을 낳게 되며
이는 곧 회사의 자금난을 가속시켜 도산을 하게 돼 근로자는 직장을 잃게
되는 등 근로자의 생활복지나 고용안정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고
지적했다.

결국 도산에 따른 책임은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에게 있는데도 기업에
자금을 빌려준 제3자를 희생시키고 오히려 근로자를 우선 보호한다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헌재의 이날 결정에 따라 그동안 상대적으로 경제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근로자의 생존권보장차원에서 회사가 망하더라도 퇴직금만은 받을 수 있도록
한 안전장치는 사실상 사라지게 됐다.

당장 현재 기업부도와 관련해 법원에 계류중인 경매사건은 대체입법이
마련될때 까지 중단되게 된다.

재판부가 근로자의 생활보장이라는 입법목적의 정당성만을 앞세워 퇴직금의
우선변제를 확보하자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대신 현행 퇴직금제도를 종업원 퇴직보험 등 사회보험제도나
기업연금제의 도입 등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기업입장에서는 이번 결정으로 은행권 등 금융기관에 담보를 잡히고 자금을
대출받을때 미래에 발생할 비용인 퇴직금 부분을 미리 산정해 둘 필요가
없어져 담보능력이 그만큼 확대되게 됐다.

이에따라 금융기관도 기업측에 적용하는 담보관행에 보다 많은 융통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됐다.

즉 기업과 금융기관 모두 파산 등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무조건 우선
변제해야 하는 퇴직금만큼의 부담을 덜게된 셈이다.

노동계는 이번 결정이 기업과 금융권의 이해에 치우친 것으로 보고
대체입법과정에서 근로자의 최저생활과 실질적인 평등권보장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할 것으로 보여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이심기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