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맴도는 "넥타이 유랑족"들이 늘고 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아무런 목적지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

지난 봄 20년간 근무한 회사를 명예퇴직한 정모씨(48).

그는 매일 오전 9시 아현역에서 을지로 방면의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싣는다.

직장 다닐 때처럼 양복을 입은 채로.

지하철에서 그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신문수거.

지하철 안에는 남들이 보고 버린 조간신문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지하철 안을 한차례 왕복하면 신문 6~7개는 손에 쥐어진다.

그는 구석자리를 골라 앉아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어느 역에 도착했는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지하철이 당산역에서 다시 반대방향으로 회차할 때도 그는 꿈적 않고
신문만 본다.

부채를 파는 행상이 자신앞에 부채를 내려놓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는 신문의 기사 뿐만 아니라 숨은그림찾기, 퍼즐, 광고까지 글자 한자
빼지 않고 탐독한다.

점심은 을지로입구역 구내 식당에서 간단히 컵라면이나 김밥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역내에 있는 을지서적으로 가서 주간지와 월간지, 신간서적들을
쭉 훑어 본다.

2시간 넘게 보면 다리가 뻐근해 온다.

이때 다시 지하철을 탄다.

이번에는 자면서 한바퀴 돈다.

불황의 골이 깊어질수록 지하철에는 정씨같은 "나홀로 지하철족"들이 자주
눈에 띈다.

대기업체 차장을 지낸 K모씨(42).

그는 매일 부인이 모는 차로 서울역에 있는 회사까지 출근했다.

그러나 현재 실직 1개월째.

부인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는 아침마다 회사에 가는 것처럼 서울역에서 내려 지하철내 물품보관소로
향한다.

거기서 등산복과 운동화를 꺼내 화장실에서 양복과 바꿔입는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도봉산이나 관악산, 북한산을 찾아가 시간을 보낸다.

이런 명퇴족이 늘어나면서 등산로 입구에서 등산복 등산화를 빌려주고
물품을 보관해주는 신종 서비스업이 성업중이다.

"실직한 뒤 만사가 귀찮아 지하철을 타고 빙빙돌거나 지하철역 인근 산을
찾는다. 아내와 자녀들이 모르도록 월급은 퇴직금을 쪼개 매달 통장에
입금시키고 있다. 1주일에 한 두번을 야근했다며 늦게 들어가곤 한다"(K모씨)

남산도서관에 이르는 소월길의 풍경은 좀 색다르다.

오전 10시만 되면 이 길에는 양복차림의 운전자들이 길옆에 차를 대놓고
서 있다.

주로 최근에 실직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이 길은 일명 "명퇴로"로 불린다.

명퇴유랑족은 분명 우리사회의 새 풍속도가 됐다.

30~40대에 실직, 실의속에서 방황하는 이들 신유랑족들.

한창 일할 나이에 지하철 극장 경마장 산 서점 등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그들은 세대교체 바람과 구조적인 불황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다.

이제 이들의 얘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누구나 밤새 안녕하셨느냐는 인사에 신경을 써야 하는 시대가 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한은구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