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여에 걸친 극심한 경기침체는 경제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한보 삼미 대농 진로 기아로 이어지는 대기업의 좌초로 국민들은 얼이 빠져
있다.

지난 상반기에 부도난 회사만도 7천2백33개에 달한다.

상장 회사도 12개나 된다.

특히 명예퇴직 등으로 ''고려장''을 당하는 ''애늙은이''들이 급증,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93년이후 50대그룹과 정부투자기관 등에서만 2만1천7백여명이 쫓겨 났다.

우리사회에 6만여명의 비자발적 실업자들이 비탄에 잠겨 있다.

어느 사이에 정리해고시대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이는 분명 ''샐러리맨의 죽음''이다.

문민정부시대에 불어닥친 불황.

그 풍속도를 짚어본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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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노이로제"(신경증) 환자가 급속히 늘고 있다.

불황으로 샐러리맨이나 자영업자 모두 신경이 곤두선 때문이다.

회사주변 약국은 두통이나 복통 정신불안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줄을
잇는다.

대기업인 S사에 다니는 최운재(37)씨는 "경기가 나아질 조짐은 보이지
않는데 실직당하는 친구들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늘 불안하다"고 토로한다.

한마디로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빚어진 "정신적 공황증후군"이다.

을지로 J약국에서 일하는 K씨는 "올들어 많은 직장인들이 신경성위염이나
두통증상을 호소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처방이 있을리 없다.

진통제나 피로회복제 신경안정제를 조제해 준다.

이 정도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증상이 심해 아예 병원을 찾는 직장인도 많다.

이들은 신경쇠약증세가 심해져 우울증이나 불면증으로 발전한 환자가
대부분이다.

증세가 심한 환자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갑자기 헛소리를 하기도 한다.

제조업체에서 13년간 근무해온 K씨(41)의 경우는 불황이 몰고온 정신적
공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보여준다.

"밤에는 잠도 못잔다. 하나라도 아이디어를 제출해야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서다. 그렇다고 제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루종일 피곤함을 느낄 뿐이다. 이러니 건강하던 몸도 괜히 아픈 것 같다.
틈만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른바 "실직공포증후군"이다.

J은행 기업자금담당 O대리(36)의 경우도 비슷하다.

불황으로 중소기업 부도가 연이어지자 자리에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담보는 충분히 잡아 놨지만 모를게 부동산가격이다.

그렇잖아도 명예퇴직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직장이라서 실적에 더욱 신경이
쓰인다.

요즘은 아예 몇몇 기업리스트를 꼽아 놓았다.

매일 한번씩 전화를 하거나 직접 들른다.

사설 심부름센터에 의뢰,주요 임원들은 감시하고 있다.

혹시 부도를 내고 튈까 염려해서다.

이러니 "전화벨만 울려도 깜짝깜짝 놀랄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중소기업 자금담당 K차장도 마찬가지다.

요즘같이 자금이 마른때는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상황이다.

"부도공포신드롬"에 휩싸여 있다고나 할까.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나미박사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두통이나 만성피로로
나타난다"며 "특히 실직에 대한 공포는 회사일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켜
생산성을 더욱 떨어뜨릴 뿐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창의성발휘를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고 말한다.

경제적 불황이 정신적 공황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상은 YS정권 후반기에
두드러지는 사회적 병리현상이다.

< 김준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