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반대신문이 진행된 한보사건 2차공판에서는 피고인들 모두 돈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처지를 호소하며 다양한 "형량깎기" 전략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은행장들은 불우한 가족얘기를 털어놓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찬목 전조흥은행장은 "군의관으로 간 아들이 팔이 부러져 정형외과
전문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비관한 끝에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며
"가족들 모두 이사할 것을 요구하는 등 강박관념에 시달린 끝에 이사자금
마련으로 돈을 받아 썼다"며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효산그룹 불법대출과 관련해 이미 구속된 상태에서 이번 사건으로 추가
기소된 이철수 전제일은행장은 첫번째 구속당시 군의관으로 재직중이던
아들이 임파선암에 걸려 의가사제대하는 등 불행한 가정생활을 겪고 있다고
울먹이며 변론을 끝내기도 했다.

신광식 전제일은행장은 한보철강 당진제철소의 공사중단은 국가경제에도
큰 손실이라고 판단했다고 대출경위를 거창하게 설명하면서도 돈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은행장 직무수행에 판공비로는 부족하다고 궁색한 발언을
해 방청객들의 눈총을 받았다.

여야의원들도 정치인이라는 직업상의 특수성을 들며 "돈이 원수"라고
강변하는 전략을 펼쳤다.

홍인길의원은 총무수석재직 당시에는 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각,
대출청탁과 관련해 금품을 받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또 받은 돈도 과거에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을 위한 자금으로 대부분
사용했고 자신은 현재 분당에 아파트 한 채와 약간의 적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며 "청렴성"을 강변하기도 했다.

황병태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경북 예천전문대학의 후원회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문예진흥기금으로 20억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돈을
받았다고 궁색한 처지를 털어놨다.

한편 황의원은 자신의 혐의에 대해 "범죄"였다고 시인, 정공법으로 나서서
주목을 받았다.

황의원은 "정치인들은 갖은 청탁을 조심성없이 무조건 받아주는 잘못된
풍토에 젖어 있다"며 "정총회장으로부터 대출청탁을 받았을 때 사안의
앞뒤를 가리지 않고 선뜻 응한 것도 정치권의 만성적인 부패관행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 버린 결과"라고 말해 방청객의 공감을 자아냈다.

김우석 전내무장관은 장관 재직시절 판공비조차 공과사를 엄격히 구분해
청렴강직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며 정총회장이 자신의 차기총선출마에
관심을 보여 정치자금으로 생각하고 받았다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놨다.

< 이심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