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진구 군자동에 위치한 유치원 "즐거운 어린이 집".

여느 유치원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가나다"나 "ABC"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들리는 건 아이들의 웃음소리 뿐이다.

문을 열어보면 아이들은 마당 가득 흙 장난 물 장난을 치고 있다.

통통하지만 검게 그을은 얼굴 모래투성이의 옷 등....

영락없는 시골 놀이터의 모습이다.

서울 한복판이란 생각이 안든다.

"즐거운 어린이 집"은 맞벌이 부부가 일하는 동안 아이를 맡기는
보육원겸 유치원.

아이를 믿고 맡길 데가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주부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여 세운 것이 특징이다.

주부 30여명이 모여 조합을 결성해 설립한 것.

"유치원에 깔끔한 드레스만 입고 다니던 아이가 여기 와 처음 며칠은
어울리지 못했어요.

옷을 버릴까봐서죠. 그렇지만 너무 재미있어 보이니까 아예 옷을 벗어
놓고 같이 흙장난을 치더군요" (전옥현 원장.34)

아이들은 대부분 살이 올라있다.

인스턴트 식품은 전혀 없이 영양교사가 직접 구운 우리밀 빵이나 떡볶이
등이 하루 두번 간식으로 제공된다.

식사도 반드시 현미 조 수수를 넣은 잡곡밥만 먹인다.

먹고 노는 가운데 교육효과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도록 배려하고 있다.

매일 하는 동네 나들이를 갈 때도 다녀와서는 꼭 지도를 그려보도록
유도한다.

아이들은 어린이 집 간판과 벽화를 직접 그리고 소고 꽹과리 등으로
국악놀이도 한다.

유치원 앞 세종대 캠퍼스와 근처 어린이대공원 식물원 동물원도
아이들이 자주 찾는 견학코스다.

그렇지만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법은 없다.

아이들에겐 천국일지 몰라도 부모들에게는 많은 숙제거리를 안겨주는게
대조적이다.

우선 흙덩어리 옷을 매일 빨아대야 한다.

매일 선생님이 적어주는 육아일지를 보고 같은 수첩에 일지를 적어
보낸다.

엄마건 아빠건 두달에 한번씩은 일일 교사가 되어 아이들과 놀아줘야
한다.

유치원 청소도 직접 해줘야 한다.

"유치원 낮잠시간 때 처럼 잠들때 까지 책을 읽어달라"며 피곤한
부모를 더욱 괴롭히는 아이들이 많다.

그래도 하루하루 밝아지는 아이들의 모습에 힘든 줄 모른다.

"즐거운 어린이 집" 같은 "육아협동조합"은 광진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94년 연남동에 처음 세워진 이래 대구 등 전국 12군데에서 이미
문을 열었고 상계 부천 등지에서도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조합원 중 다수가 대학때 시위에 나섰던 운동권 출신이라는 것도
특이한 점.

기존의 틀을 깨려는 이들의 진보적인 사고방식 때문으로 풀이된다.

조합을 세워 어린이 집을 운영하는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돈이다.

조합설립에 보통 1인당 4백만원 정도라는 적지 않은 돈을 부담해야 한다.

또 매달 추렴하는 30여만원의 운영비로는 7~8명이나 되는 교사들에게
넉넉한 보수를 주는데 한계가 있다.

이에 대해 공동육아연구원 신정혜씨는 "육아협동조합은 핵가족시대의
자녀들에게 공동체의식을 심어주고 있는 새로운 교육운동"이라며 "이를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 김주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