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끝내 증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최규하 전대통령은 14일 강제구인돼 법정에 섰으나 선서와 증언을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이날 오전 10시.

12.12 및 5.18 항소심 11차 공판이 열린 서울고법 417호 대법정.

권성부장판사의 개정 선언에 이어 전두환 노태우피고인 등 16명이 차례로
피고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뒤 권부장판사는 "피고인, 아니 증인 최규하에
대한 증인심문을 하겠습니다"고 말했다.

(권부장판사는 증인을 피고인으로 잘못 부를 정도로 긴장된 모습이 역력)

피고인측 변호인이 전.노 두피고인의 일시퇴정을 요청, 재판부가
받아들이는 바람에 역사적인 전직 대통령 "3자 법정 동석"은 무산되고
말았다.

전.노 두 피고인이 퇴장한후 재판장은 증인 최전대통령의 입정을
명령했다.

재판장은 재판사상 처음으로 증인입장시 검찰, 변호인, 방청객들 모두가
자리에 일어서도록 했다.

기립한 모든 사람의 눈이 출입구로 쏠린 것은 당연한 순서.

비서관의 부축을 받고 오른손에 검은색 지팡이를 짚은 최전대통령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와 가벼운 목례를 한뒤 증인석에 특별히 마련된 안락
의자에 앉았다.

권부장판사는 최전대통령을 일어서게 한뒤 "증인 최규하씨 맞죠" "사시는
곳이 서교동 맞죠" 등 인정신문을 마치고 선서를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최씨가 뭔가 말을 하려하자 권부장판사는 곧바로 "거짓 진술을 하면
위증죄로 처벌받습니다"고 덧붙였다.

찬물을 끼얹은듯 법정은 조용해졌다.

최씨는 곧바로 "증인선서에 앞서 내입장을 밝히겠습니다"면서 호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16절지 발표문을 펴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본인의 의사와 달리 증언이 이뤄져 유감입니다"로 시작해서 "역사적으로
전직대통령이 법정에 출석 증언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본인이 선례를 만들어
후임대통령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증언에 따르지 못한 점을 깊이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5분여에 걸친 입장표명을 마치자 재판장은 난처한 기색으로 "일단 몸이
불편하시니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한뒤 형사소송법상 증인선서 의무
조항을 들어 최전대통령의 입을 열게 하려고 증인신문과 함께 설득작업을
폈지만 최전대통령은 꿈쩍도 하지않았다.

이후에도 모든 질문에 시종일관 묵묵부답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경력을 묻는 질문에도 "..."이었다.

가끔 천장만 쳐다볼 뿐이었다.

재판장은 결국 "증인이 성의없는 답변을 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그러나 부끄러운 일이니 증인거부에 대한 제재조치를
하지않겠다"고 실망한 표정으로 서둘러 증인신문을 끝냈다.

(이때까지 걸린 시간은 모두 50여분).

끝까지 증언을 거부한 최전대통령은 재판부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하고
천천히 증인출구까지 걸어갔다.

그러나 돌아선 자신의 뒷모습에 쏟아지는 비난의 시선을 의식한 듯 다시
한번 돌아서서 방청석을 향해 인사를 한뒤 황망히 법정을 떠났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듯이.

[[[ 최씨 ''증언거부 입장'' 전문 ]]]

"존경하는 재판장님, 검찰관, 변호사, 방청객 여러분.

본인은 근 80평생을 상식을 바탕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국법의 집행에
따르지않을 수 없어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으나 이는 본인의 의사와 달리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본인은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와서도 처신을 은인자중했으며
비록 일시적으로 비난의 화살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덕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직 대통령이 재임중 수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후일 일일이 소명이나
증언을 해야 한다면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헌정사상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출석해 증언한 전례가
없었던데다 본인이 전례를 만들어 앞으로 배출될 수많은 대통령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냉엄한 안보현실과 평화적 통일을 바라보는 대국적인 관점에서
국익에 손상을 줄 우려가 있는 일은 하지말아야 한다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지켜야할 덕목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 전직 대통령의 증언은 대통령의 상징성과 국가원수의 삼권분립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써 그것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원칙과 소신으로 이제까지 본인은 재임중 국정행위에 대해 말을
한바 없으며 귀 법원의 증언요구에 따르지 못하는 참뜻을 깊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