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을 코 앞에 두고 일부 고등학교의 상위권 학생들이
묘한 공포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평소 본인들의 실력을 차질없이 발휘만 한다면 원하는 대학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는 이들에게 나타난 공포감은 "커닝 폭력"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들 학생 사이엔 예컨대 "지난해 서울대를 목표로 수능 시험을 치렀던 모
선배는 시험장에서 커닝을 강요당해 시험을 망쳤다더라"는등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나돌면서 공포분위기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

서울 8학군 지역의 K고 3학년 K군의 경우도 이같은 공포감에 싸여 있기는
마찬가지.

11일 자정 과일 접시를 들고 K군의 방에 들어선 어머니 P씨와의 짤막한
대화에서도 커닝폭력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P씨:얘, 걱정할 것 없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들 하지 않니.

그만큼 열심히 했으면 됐지 뭘 그러니.

네가 하던 대로 하기만 하면 너는 합격이야.

K군:엄마, 나도 자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재수도 좀 따라 줬으면 좋겠어요.

P씨:열심히 했으니까 네가 아는 문제가 많이 나올거야.

K군:그런 것 말고요.

P씨:그럼 무슨 재수를 찾니.

K군:내 뒷자리에서 시험보는 놈을 잘 만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P씨:그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뒷사람이 무슨 상관이 있냐.

K군:뒤에서 쿡쿡 찌르면서 보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죠.

그게 고민이에요.

친구들이 그러는데 심한 놈들은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같은데로 끌고가
"커닝 폭력"을 쓰는 사례도 있대요.

P씨: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시험 감독관이 있는데 어떻게...

감독관이 한 시험장에 두명이나 있고, 부정행위를 하다 발각되면 시험은
무효로 되고 앞으로 2년간 응시자격도 없어진다고 하는데 어떻게 "커닝"을
한단 말이냐.

K군:엄마는 참 순진도 하네요.

수능시험 감독관은 헛거래요.

있으나 마나래요.

부정행위자를 발견해도 잡아낼 수가 없대요.

P씨:그건 또 무슨 말이냐.

K군:감독관이 부정행위자를 적발했더라도 처벌하기 위해서는 컨닝을 했다는
자술서를 받아야 되는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죠.

"너 고개를 돌렸잖아"라고 따져봤자 "언제 그랬느냐"고 딱 잡아떼면 그만
아니겠어요.

선생님도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한 인간의 인생을 좌우하는 시험"인 만큼 감독관이 법대로 하지 못할
테니까 요령껏 볼 수 있으면 보라고요.

P씨:만약 그렇다면 감독관에게 사실대로 이르면 되지 뭘 그러냐.

K군:그래봤자 감독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뻔하지 않겠어요.

내자리 근처에 와서 서성거리거나 헛기침하는게 고작이겠고...

P씨에게 이제 기도할 거리가 두 가지 더 생겼다.

하나는 아들과 동일한 유형의 시험지로 시험을 보는 대각선 뒷자리에
"모진 학생"이 앉지 말기를.

또 하나는 시험 당일 만은 아들이 "모범생"보다는 "깡패"로 비춰지기를.

< 윤성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