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골프 천재였다. 다섯 살에 처음 골프채를 잡아 10대 초반에 세계 아마추어 골프계를 평정했다. 천재 소녀는 2012년 14세의 나이로 2012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캐나다 여자오픈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투어 역사상 최연소 우승이었다. 이듬해 2연패를 달성하며 프로로 전향했다. 그로부터 10년간 리디아 고(한국이름 고보경·26·뉴질랜드)는 종횡무진이었다. LPGA투어에서만 19승을 했고, 개인통산 25승을 거뒀다. 125주간(누적 기준) 세계랭킹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오랜만에 한국 대회를 찾은 리디아 고를 지난 24일 인천 청라에서 만났다.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날 인천 베어즈베스트 청라에서 막을 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하나금융그룹 챔피언십에서 커트 탈락한 뒤였다. 그는 “아이언 샷이 너무 안 맞아서 경기가 풀리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프로 데뷔 10년을 맞는 올해의 시작은 화려했다. 지난해 LPGA투어 상금왕, 올해의 선수, CME글로브레이스 1위를 싹쓸이했고 시즌 첫 출전이던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투어 아람코사우디레이디스인터내셔널에서 우승했다. 샷이 흔들린 것은 지난 4월께부터였다. 6월 마이어클래식에서 커트 탈락한 것을 시작으로 상위권에서 그의 이름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올해 초만 해도 1위였던 세계랭킹이 10위로 내려갔다.
아직도 위기의 타개책은 확실치가 않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그는 “성적이 좋진 않았지만 드라이버가 전성기 시절보다 더 잘 맞았다”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했다. 이어 “한동안 뭘 해야 할지 의문을 품었는데 지금은 조금씩 답을 얻어 풀어가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며느리 김혜영 씨(63·사진)가 항저우 아시안게임 브리지 종목 국가대표로 뛴다. 김씨는 정 명예회장의 7남인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부인이다.
한국브리지협회 부회장인 김씨는 2010년을 전후해 브리지에 입문했다. 매년 자선 모금을 위한 브리지 대회를 열고 그 수익을 사랑의열매에 기부하고 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나서는 김씨는 27일 혼성 브리지로 첫 예선전을 치른다. 강성석·오혜민·노승진·이수익·김대홍과 함께 팀을 꾸렸다.
브리지는 52장의 플레잉 카드를 활용한 게임이다. 경기에는 4명이 참가하며, 2인이 한 조를 구성한다. 같은 팀(파트너)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는다. 13장씩 카드를 나눠 가지고 시작한다. 주 공격수인 ‘디클레어러’가 어떤 문양을 낼지 결정하는 ‘계약’을 진행하면 디클레어러 왼쪽에 앉은 사람이 카드를 한 장 내야 한다. 나머지 3명은 같은 문양을 따라 내야 하고, 가장 높은 숫자를 낸 사람이 4장의 카드를 가져간다. 협공을 통해 카드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파트너에게 본인의 패를 설명하는 ‘비딩’ 절차가 매우 중요하다. 풍부한 경험과 파트너와의 팀워크 또한 요구되는 종목이다.
브리지 특성상 출전 선수 연령대가 높다. 아시안게임 한국 대표팀 최고령 선수도 브리지의 임현(73)·김윤경(73)이다. 브리지는 2022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과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시범 종목이었다. 이후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과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
“저를 ‘안경사들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제 손으로 우리나라 안경사 역사를 일궜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자부합니다.”김태옥 시호비전그룹 회장(79)은 대한민국 안경업계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안경법 통과, ‘안경사의 날’ 제정에 앞장서며 30년 넘는 세월을 안경사업계의 초석을 다지는 데 바쳤다.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일 대한안경사협회는 ‘제34회 안경사의 날’을 기념해 김 회장에게 특별공로상을 시상했다. ‘안경에 미쳤다 싶을 정도로 안경만 보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안경사들의 아버지 김태옥 회장을 만났다.그의 첫 번째 목표는 안경사의 전문화였다. 그가 안경업에 뛰어든 1980년대에는 안경사라는 직업이 없었다. 김 회장은 “안경사라고 하면 그냥 안경을 파는 판매원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안경사가 교육과 훈련을 거쳐 검증된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신념이었다.그 시작은 안경법 제정이었다. 김 회장이 끈질기게 여야 국회의원들을 설득한 결과 1989년 안경법이 정기국회를 통과했다. 그해 12월 의료기사법개정법률이 공포되면서 안경사 제도가 도입됐다. ‘안경사’라는 직업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는 “당시 안과의사들의 반발도 강했지만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다”며 “전문적인 안경사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현재는 대학의 안경광학과를 졸업하고 국가공인 시험을 통과해야 면허증을 받아 안경사로 일할 수 있다. 전국 43개 대학의 안경광학과에서 연간 1500여 명의 안경사를 배출하고 있다.그는 여전히 안경사를 바라보는 인식이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