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를 불문하고 직업가진 이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어느순간에서든지
자신이 원하는 일에 대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위치에 맞는 내실을 갖추는
것은 자리확보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서울법대수석졸업(67년)에 사법시험 13회 수석합격(71년) 여성최초 지방
법원부장판사(88년) 여성최초 사법연수원교수(92년) 여성최초 고등법원부장
판사(95년) 여성단체협의회 "올해의 여성상" 수상(95년).

대전고법 이영애부장판사(48)의 이력서는 온통 "1호" "수석"이라는 수식어
로 덮여 있다.

""여성1호"라는 호칭에 대해 책임감은 느꼈지만 특별히 짐스럽게 여기지는
않았어요. 모든 해답은 다 "자기 직업을 얼마나 잘 해내는가"에 있으니까요"

일단 시험합격이후에는 비교적 자율성이 보장되고 특히 연공서열이 중시
되는 곳인 만큼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리할 것은 없었다.

"제가 서울대법대에 입학한 68년에는 전체 160명중 여학생이 저를 포함해
단 둘이었죠. 그 수가 86년에는 22명(전체 298명), 96년에는 42명(전체
235명)으로 늘었어요. 이태영 강기원 황산성변호사등에 이어 제가 5번째
여성 사시합격자였는데 이제는 여성법조인이 136명에 이르렀구요. 학생수
증가를 반영하듯 94년에는 사법시험 여성합격자가 10.7%를 넘어섰죠"

사법시험 합격인원의 10분의 1을 차지했다는 것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막을
수없는 대세라는 것을 드러내 주는 중요한 지표.

앞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뒷받침해 준다면 그 수치는 더욱 올라갈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스스로 인정하듯 상당히 복받은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이경호 전보사부장관)와 외할아버지(진직현씨)가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도 직업(의사)을 가졌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내 일을 갖고 산다" 특히
"법조계로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 부군 김찬진변호사(55)는 국무총리기조실 여성정책심의위간사였는가
하면 86년부터 여성단체협의회 고문변호사로 일하는 소문난 "페미니스트".
이판사는 지난해 9월부터 임지인 대전에서 생활하고 있다.

재판준비로 분주히 지내다가 주말에만 서울의 가족을 만나는 빠듯한 생활.

초등학교 2학년생인 막내 아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어머니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