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전 9시24분.

노태우 전대통령의 연희동 사저의 문이 열렸다.

끼-이익.

0도로 뚝떨어진 날씨탓에 철문은 유난히도 기분나쁜 소리를 냈다.

반쯤열린 문사이로 노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지난달 27일 대국민사과성명을 발표한지 5일만이었다.

흰와이셔츠와 군청색계열의 넥타이위에 받쳐 입은 감색정장이 깔끔했다.

재임시 외국손님들을 대할때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복장은 그랬다.

세련된 복장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얼굴은 부은 듯보였다.

굳게 다문 입술은 결심의 입술이라기 보다 쫓기는 자의 초조한 입술
이었다.

그의 눈은 4성장군출신 답지않게 정면을 향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무엇이 부끄러웠을까.

아마도 그는 자신에 대한 호칭이 "노태우전대통령"에서 "노씨"로 바뀐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문을 나서던 그는 순간적으로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김옥숙여사의 배웅에 대한 인사였으리라는 추측이다.

찰나의 인사를 끝낸 노씨는 서울2 프2979 그랜저승용차에 몸을 던졌다.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최석립전경호실장 박영훈비서관등 측근들과 경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두 대의 차에 나눠탔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익숙한 몸동작들이었다.

3대의 차에 시동이 걸렸다.

이윽고 출발. 2979가 앞장서고 2대가 뒤를 따랐다.

시간은 9시25분.

1분만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

차뒤에서 다시 대문이 닫혔다.

철커덩-.

흡사 교도소문이 닫히는 소리같았다.

찬바람이 이 쇳소리를 삼켰다.

전직대통령의 헌정사상 첫 검찰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노씨의 사저와 약 6백m 떨어진 전두환전대통령은 한때 친구였고 같은
전직대통령으로서 검찰에 불려가는 노씨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듯 이날
오전 9시께 어딘가로 외출했다.

기이한 인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친구이자 같은 장군출신이자, 쫓겨가고 숨어살고...

연희동은 결국 지난 88년 11월23일 전전대통령이 노전대통령에 의해
백담사로 쫓겨난 지 6년 11개월여만에 이번 노씨가 검찰에 소환조사받는
치욕의 11월을 두번 맞은 셈이다.

연희동 골목길을 나선 차는 서초동 대검청사를 향해 내닫기 시작했다.

전날흩뿌린 비로 하늘은 청명하고 구름은 군데군데 탐스럽게 폈다.

아름다운 가을길이 노씨에겐 믿기는 않는 길이요 불명예의 길이었다.

달리던 차는 갑자기 외도하기 시작했다.

연희동-연대앞-광화문-시청-반포대교-검찰청으로 예상됐던 검찰행이
서대문구청-무학재-서울역-남영역-중경고-잠수교-잠원로터리-검찰청으로
급변경됐다.

예상된 길을 달릴 경우 시민과 대학생들의 기습공격 등 불상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했다.

검찰출두길에는 경찰측이 신호기조정 차량선도등을 지원했다.

변경된 코스가 당초 코스보다 우회하는 길인데도 검찰도착 소요시간이
21분밖에 안걸린 것도 전직대통령출두에 대한 경찰의 최소한의 예우였다.

여기에다 차가 교통신호로 멈춰서면 노씨를 알아본 시민들이 격분,
노씨에게 모욕을 가할 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반포대교위의 바람은 거셌다.

서글픈 사람에게 강바람은 생각을 정리하게 만든다.

고민에 빠진 사람이 강을 찾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전직대통령차의 창문은 열리는 법이 없다.

잠원로타리에서 직진한 차량은 곧바로 대검찰청사로 향했다.

오전9시45분.

현관출입구앞에 멈춘 서울2프 2979의 문이 열리고 노씨가 나왔다.

포토라인뒤에 늘어선 2백여명 사진기자의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노씨는 보도진에 포즈도 취해주지 않은 채 현관문을 향했다.

포즈를 취해주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속았다"는 말이 터져나왔다.

현관회전문을 들어선 노씨는 침통하고 무거운 표정이 역력했다.

기자들이 한마디만 해달라고 주문하자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라는
짤막한 답변만 남기고 11층 특수조사실로 직행했다.

짧은 21분간의 스케치이지만 역사에 길이남을 21분이었다.

연희동주민의 한마디가 귀에 생생하다.

"이런 부끄러운 아침 다시는 맞고싶지 않습니다"

<송진흡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