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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 김동욱 기자
    김동욱 기자 오피니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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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경제 중기과학부장입니다.

  • 한국식 치킨은 문명화된 음식?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주요 치킨 프랜차이즈들이 잇따라 치킨 가격을 인상하고 나섰다. 지난 15일 굽네는 배달 수수료와 인건비, 임대료 상승을 이유로 대표 메뉴인 '고추바사삭' 등 9개 치킨 제품 가격을 일제히 1900원씩 인상했다. 굽네가 가격을 올린 것은 2022년 이후 2년 만이다. 치킨·버거 브랜드인 파파이스도 2년여 만에 가격을 올렸다.지난해 4월에는 교촌치킨이, 12월에는 bhc가 주요 제품 가격을 3000원 올렸다. 앞서 BBQ는 2022년에 주요 제품 가격을 2000원 인상했다.한때 '서민 음식'으로 불렸던 치킨에 부담스런 가격이 책정된 가운데,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각종 닭고기 상품에는 공통점이 있다.바로 닭이 부위별로 분리돼 요리된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닭 한 마리가 통째로 식탁 위에 오르는 광경이 적지 않았지만, 어느 때부턴가 다리나 날개, 가슴살 식으로 분리된 형태의 닭고기가 친숙하게 됐다.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래서 별도로 의식하기 힘든 이 같은 현상을 두고 20세기 초 저명한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손쉽게 표현하자면 닭의 원래 형태를 알기 힘든 오늘날 ‘치킨’이 닭이 양반다리 하고 앉아있는 삼계탕 보다 보다 ‘문명화된’ 음식이라는 식의 주장을 폈던 것이다.엘리아스의 저서인 <문명화 과정>에 따르면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 고기 요리를 대하는 서구인들의 태도도 큰 변화를 겪었다.그 흔적은 서구사회의 각종 예의범절의 변화와 발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중세 서양 상류층 식탁에선 요리가 된 동물의 전신이 그대로 올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소나 송아지처럼 동물의 전신이 그대로 식탁 위에 오르기 힘든 경우는 그 동

    2024.04.16 06:00
  • [토요칼럼] 은방패 부대와 86세대의 '선택'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도 원정에 즈음해 자신의 친위부대인 히파스피스테스에게 은으로 장식된 방패를 나눠줬다. 이들은 이후 ‘은방패 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아버지 필리포스 때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 가문과 동고동락한 은방패 부대는 단연코 최강의 부대였다. 그들의 창과 방패 아래 페르시아 제국이 쓰러졌고, 세계 정복은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수많은 실전 경험과 승리에 대한 기억으로 단련된 이들의 위용은 노년이 돼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사후인 기원전 317년. 오늘날 이란 가비에네에서 마케도니아 장군들 간의 후계 전쟁이 벌어졌을 때 주로 70대로 구성된 은방패 부대가 전장의 승패를 가르는 역할을 했다. 로마 시대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은방패 부대는 나머지 병사들이 쓰러졌을 때도 똑바로 대열을 맞춰 전장을 누비며 저항하는 자를 모두 쓸어버렸다”고 그들의 노익장을 묘사했다.고대의 은방패 부대에 비견되는 집단이 현대 한국 사회에 있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86세대’로 통칭되는 50대 중반~60대 중반 그룹이다. 은방패 부대가 막강한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렸듯 86세대는 무소불위의 군부 정권에 맞섰다. 마케도니아 군단이 거침없이 이집트와 인도까지 밀고 들어갔던 것처럼 86세대는 정치·경제·문화·사법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병사들이 청년기부터 노년까지 쉼 없이 전장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것과 같이 대학생 시절부터 ‘어른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백발이 성성해졌어도 한국 사회의 주인공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다.야당의 기록적인 압승으로 끝난 22대

    2024.04.12 18:36
  • 자기 파괴적 '네로 명령'과 의사 '집단 사직'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1945년 3월 19일 독일의 패망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네로 명령(Nerobefehl)’이라고 불리는 ‘자기파괴 명령’을 냈다.“독일 내 모든 군사적 교통수단, 방송 장비, 산업시설과 생활 관련 시설들을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즉시, 혹은 가능한 한 단시간 내에 파괴하라”는 것이었다.이 같은 자살·자폭 명령은 1945년 3월 이후까지 독일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던 일부 지역에서 거침없이 수행됐다.전쟁이 막바지로 갈수록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을과 도시를 사수하다 죽어라’라거나 ‘무기를 손에서 놔선 안 된다’라는 비이성적인 명령이 잇따랐다.비합리적 명령에는 도시를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은 사살하라는 내용도 포함됐다.히틀러의 비이성적인 명령에 열렬히 따르는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적지 않았다. 여전히 독일 내 상당수 지역에서 총통의 명령은 최고의 규범이었다.나치당과 SS, 열렬한 나치 추종자들은 ‘파괴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들은 6주간에 걸쳐, 적군의 폭격과 포격이 파괴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부숴버렸다.그들은 또 마을을 파괴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반대하는 자, 태업하는 자들에 대해 총살형과 교수형을 취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수 주에 걸쳐 독일인들은 한편으론 적군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론 자국 정부 기관에 의해 조국이 타오르는 모습을 봐야 했다.‘네로 명령’에 앞서 2월 20일엔 제국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가 ‘유대인이 관련된 독일 내 모든 문서(비밀문서이거나 다루기 까다로운 모든 문서)를 조직적으로 파괴하라’고 명령했다.어떻게 이렇게 극단적

    2024.03.26 06:00
  • [책마을] '중국몽의 그림자'로 뒤덮여 버린 한국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다. 개인은 무례하고, 국가는 무도하다. 고압적이고 위압적인 언행, 안하무인 방식은 비즈니스건 외교건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 중국 얘기다.<불통의 중국몽>은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인 저자가 중국의 전방위적인 ‘영향력 공작’ 실상을 전하며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한국의 칼날을 무디게 하기 위해 중국은 한국 사회 속 친중 세력을 적극 활용한다. 친중 세력은 △한반도 통일을 중국이 지지하며 △북한의 비핵화에 중국이 협력하며 △거대 중국 시장은 한국 경제의 목숨줄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 중국은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의 폐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중국의 ‘갑질’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저자는 ‘극중팔계(克中八計)’를 제시한다. 외국의 간첩 활동 등을 다루는 국내법을 정비하고, 이적 개념을 정비할 것을 주문한다. ‘사이버 안보법’을 제정하고 우리의 국가 주권을 존중할 것을 분명히 한 대중국 외교 원칙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언제까지 한국은 중국에 약점을 무방비로 드러내고 있을지, 언제까지 중국에 휘둘리기만 할지 저자가 던진 질문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김동욱 오피니언부장

    2024.03.22 18:54
  • 중국몽의 그림자가 한반도를 짙게 감싸고 있다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다. 개인은 무례하고, 국가는 무도하다. 고압적이고 위압적인 언행, 안하무인 방식은 비즈니스건 외교건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 중국 얘기다. 중국은 ‘말이 안 통하는’ 나라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중국은 이미지 쇄신을 위한 방책으로 국제사회가 수용할만한 가치를 갖추는 ‘정공법‘ 대신 편법과 불법을 동원한 영향력 확대라는 ‘사술’을 동원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불통의 중국몽>은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인 저자가 중국의 전방위적인 ‘영향력 공작’ 실상을 전하며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이런 중국의 ‘공작’ 대상에 당연히 한국도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구워삶기에 필사적이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14개국 중 사회주의 체제 경험을 공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중국의 방어선이라는 ‘제1도련선’ 안쪽 중심부에 주한미군이라는 치명적 존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칼날을 무디게 하기 위해 중국은 한국 사회 속 친중 세력을 적극 활용한다. 친중 세력들은 △한반도 통일을 중국이 지

    2024.03.22 14:48
  • 삶을 덮치는 '기술 충격파', 피할 틈이 없다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증기 기관이 최초로 상업화한 해는 1712년이었다. 하지만, 증기 기관이 경제 활동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기까진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증기 기관 도입 후 산업화가 활발하게 진행된 결과, 영국의 1인당 총생산 증가가 눈에 띄게 가속화된 것은 1830년대 이후였다.마찬가지로 전구는 1879년에 발명되었지만, 미국에서 생산성 향상 추세가 가속화된 것은 그로부터 50년 이상 지나서였다.기술 혁신은 빠르게 진행됐지만, 신기술이 삶 속에 녹아들고 삶을 바꾸는 데에는 시차가 있었다.프랑스의 경제학자 필리프 아기옹의 역저 <창조적 파괴의 힘>에는 이처럼 기술이 일상에 미치는 '시차' 문제를 다룬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대표적인 것이 컴퓨터의 영향이다. 1987년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는 “통계에만 없을 뿐 여기저기에서 컴퓨터가 보인다”고 지적했다. ‘솔로의 모순’이라고 불리는 이 말이 나왔을 당시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발명한 지 18년이나 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인들은 기술 혁신이 생산성 향상에 미치는 여파를 느끼지 못했다.정보 통신 기술과 관련한 경제 성장의 물결은 그보다 수년이 지난 후인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그 물결은 2000년대 중반까지 지속됐다.이런 '시차 현상'은 전기 보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기가 지닌 엄청난 변화 가능성을 엔지니어들이 이미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1899년까지만 해도 미국 기업은 전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경제사학자 폴 데이비드는 “19세기 말에 전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점과 20세기 말 정보통신(IT)기술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점을 평행선상에 놓고 비교해야

    2024.03.22 06:00
  • '환승연애女'와 '일편단심男'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페데리고의 매’(Federigo's Falcon)를 꼽을 수 있다. <데카메론> ‘다섯째 날 아홉 번째’ 이야기인 이 에피소드는 ‘기사도적 사랑’을 그린 중세적 가치를 다루고 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얼마만큼 희생할 수 있나’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현대 문학 작품이 떠오를 정도로 반전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한 귀족 부인을 사모해 “가산을 탕진한”한 ‘지고지순한’(?) 사나이의 러브스토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이탈리아 피렌체에 페데리고라는 청년이 살았다. 그는 피렌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인 조반나(모나 조바나)를 짝사랑했다. 조반나 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는 창 시합과 무술대회를 자주 개최했다. 걸핏하면 성대한 무도회를 열어 그녀에게 마음을 전했다. 돈을 아끼지 않고 온갖 아름다운 보석과 선물을 마련해 그녀에게 보냈다. 그러나 아름다운 미모만큼 절개가 굳은 조반나 부인은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그 남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계속된 선물과 잔치로 재산을 탕진한 페데리고는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단인 작은 농장과 진기한 매 한 마리만 수중에 남게 됐다. 그는 시골로 내려가 매 사냥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조반나 부인은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는 우연히 페데리고가 사는 곳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됐다. 조반나 부인의 어린 아들은 시골에서 여기저기 뛰어놀다가 페데리고가 진기한 매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아들은 매를 갖고

    2024.03.21 06:00
  • '징벌적 과세'는 역사 '1라운드'부터 실패했다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기원전 110년 한나라 무제는 낙양 상인 집안 출신인 상홍양(桑弘羊)을 발탁해 국가 재정을 맡겼다. 상인 출신답게 상홍양은 기본적으로 현실적이고, 유물론적이며 상공업과 무역을 중시한 인물이었다.상홍양의 정책 구상은 그의 저서 <염철론(鹽鐵論)>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재정과 외교, 도덕, 철학 등 다방면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핵심은 경제적인 내용이었다. 고대 사회에서도 정치의 중점이 경제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특히 책의 정책 초점은 국가 재정에 맞춰져 있었다.때마침 국가의 자금 수요가 폭증했다. 앞서 기원전 140년 무제 즉위 이후 한나라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번영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상류층의 사치품 수요가 급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 이민족과 군사적 대립이 늘면서 국가 재정수요가 급증했다.국가 재정을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농민들에게서 걷는 세금을 늘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농민들에게서 쥐어짤 수 있는 한도만큼 세금을 쥐어짰다는 것이 문제였다.이에 상홍양은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염철전매(鹽鐵專賣)’와 유통구조 개선 등을 통해 국고를 늘리는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게 세상사였다.태행산 동부 지역에서 대형 물난리가 나면서 70여만 명의 농민이 땅을 잃고 떠도는 사태가 발생했다. 상홍양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산이 많은 사람에게서 일종의 재산세인 ‘산민전(算緡錢)’을 거뒀다.산민전은 돈이 많은 상인과 수공업자, 고리대금업자 등에게 자발적으로 자산을 신고하게 해서 2민(緡, 1민은 1000전(錢))당 10%,

    2024.03.20 06:00
  • 가장 강성했다는 당나라의 군대가 '오합지졸'이 된 이유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당나라 군대’.흔히 ‘오합지졸(烏合之卒)’을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강성했다는 당나라의 군대가 규율 없고 군기가 빠진 병졸들을 상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당나라군이 고구려·신라와의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에서부터 청일전쟁,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군을 비하해 부른 말에 뿌리가 있다는 해설까지 다양한 주장이 인터넷을 떠돌지만 확실한 어원이 밝혀진 것은 없는 듯하다.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상 실재했던 당나라군은 '유약한 군대'로 단순히 깎아내리기 어렵다는 점이다.남아있는 자료가 중국 측 자료 일색이어서 왜곡의 소지가 적지 않지만, 고구려 역사상 최대 패전 중 하나로, 흔히 주필산(駐蹕山)전투로 불리는 안시성 회전에서 고구려군의 참패를 불러온 것은 당나라 군대의 일사불란한 규율이었다.645년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침공군을 조직해 요동 지역을 침입한다. 대(對)고구려전에 투입된 당군의 전체 군세는 (고구려에 패해 당 태종의 명성에 누를 끼친 탓에) 명기된 기록이 전하지 않지만 20여만명으로 추산된다.요동성과 백암성 등을 압도적 군사적 역량으로 제압한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 인근에서 고구려 주력부대와 대면하게 됐다.북부 욕살(褥薩) 위두대형(位頭大兄)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대형(大兄) 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15만명에 달했다. 이들 고구려 중앙군은 전국 각지의 성에서 차출한 병력과 휘하 말갈족의 여러 부족에서 동원한 병력을 합친 것이었다. 노태돈 전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이는 고구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동원이었다.전투에 앞서 열린 전략회의에서 경

    2024.03.18 06:00
  • 일본 열도 '충격'…대포 개발史 떠오르는 로켓 발사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16세기 초 영국의 헨리 8세(1491~1547년)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지옥이라도 정복할 만큼 많은 대포를 갖기로” 마음 먹었다.하지만 유럽의 변방이던 당시 잉글랜드에선 제대로 된 대포를 만들 인력도, 기술도 없었다. 최고의 대포는 독일제로 아우크스부르크의 베크 공장과 뉘른베르크의 자틀러 공장에서 제조되는 것들이었다. 독일의 대포 주조업자들은 정확하면서도 바퀴 네개짜리 마차로 옮길 수 있는 ‘가벼운(?)’ 대포를 만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군사기술 분야에서 크게 낙후돼 있던 영국은 대륙의 장인들에게 대포 제작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헨리 8세는 플랑드르의 장인이었던 한스 포펜루이테르에게 대포 생산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플랑드르에서 만든 ‘미친 마거릿(Mad Margaret)’이라는 이름의 대포는 길이가 5.5m, 구경 54cm에 무게가 무려 15t에 이르는 대형포로 명성이 자자했다.하지만 잉글랜드에서도 1541년 대포 제조에 있어 중요한 발전이 이뤄진다. 바로 성직자 윌리엄 레베트가 애시다운포트리스트에서 자체적으로 철제 대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철제 대포는 깨지기 쉽고 대단히 무거웠을 뿐 아니라 청동 대포보다 정확도도 떨어졌다. 게다가 크게 만들기도 어려워졌지만 대신 각 지방의 군소 대장간에서 싼 가격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결국 철제 대포 생산에 주력한 잉글랜드는 얼마 안가 철제 대포 수출국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1574년이 되면 너무나 대포가 많이 수출된 탓에 정치가들이 대포수출을 금지하기에 이를 지경이 된다.그렇지만 잉글랜드가 철제 대포 생산을 본격화하던 1550년대 시점에도 잉글랜드에선

    2024.03.17 06:00
  • ‘로봇’의 뿌리에 드리운 ‘여자 노예’의 그림자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초기 러시아 사회에서 남자 노예는 홀로프(холоп), 여자 노예는 라바(раба)라고 불렸다.12세기에 편찬된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인 '루스카야 프라브다'에 따르면 이들 노예의 지위는 비참했다.제대로 된 처우는 꿈도 못꿨다. 노예가 자유민을 구타했을 경우 얻어맞은 자유민은 그 노예를 죽여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또 노예를 살해하더라도 형사상의 벌인 ‘살인 배상금(비라·вира)’이 전혀 없었다. 소유주인 주인에게 ‘재산에 가한 손해’ 때문에 적은 액수의 벌금만 지불했을뿐이다.반면 상급친위대원(크냐지 무쥐·княжи мужи)을 살해하면 보통보다 두 배나 무거운 살인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이처럼 비참한 존재인 노예에서 파생된 단어가 ‘라보타치(работать)’라는 표현이다. 현대 러시아어에서 '일하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그런데 고대 러시아어에서 ‘라브(раб·교회관계 고문헌에 간혹 등장하는 남성 노예)’와 ‘라바’의 동사형인 ‘라보타치’라는 단어는 현대 러시아어 ‘라보타치(работатъ)’가 의미하는 것처럼 ‘일하다’라는 뜻이 아니었다.농사일로 대표되는 힘든 노동이란 뜻은 ‘스트라다치(страдатъ)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대신 ‘라보타치’라는 단어는 ‘주인에 대한 노예의 관계’나 ‘고용 관계로 일하는 노예 상태로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이는 같은 슬라브어 계열인 체코어에서도 마찬가지였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어낸 20세기 초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는 체코어 ‘라보타(r

    2024.03.16 06:00
  • '한국형 아우토반'으로 지역발전시킨다는데...[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속도 무제한의 고속도로 ‘아우토반(Autobahn)’은 오랫동안 독일을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다. 나치 히틀러 정권이 한 때나마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히틀러가 나쁜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아우토반을 건설했어”라는 말은 독일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표현이었다.그리고 그 같은 상징의 생명력은 질겼다. 현대 독일 안팎에서도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건설해 경제대공황을 극복했다”는 식의 표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기도 하다. “총통께서 길에다 실업을 묻어버렸다”는 나치의 선전 문구는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상식처럼 여겨져 왔다. “그때 아우토반을 건설했고, 오늘 우리가 그 위를 달린다.(Es sind auch Autobahnen gebaut worden damals, und wir fahren heute drauf.)”는 표현은 이 같은 감정이 잘 녹아 있는 문구이기도 하다.무엇보다 독일의 아우토반 건설은 대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이 투입된 사회기반시설(SOC) 건설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져 왔다. 케인스의 경제 이론에 기반했던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강력한 투자 프로그램에 따른 경기 대처라는 케인스식 불황 대처법이 행동으로 옮겨진 케이스로 꼽혀왔던 것이다. 당대에 독일 내외에서 ‘경제 기적(Wirtschaftswunder)’이라고 불렸던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아우토반을 둘러싼 이 같은 이미지들은 대부분 허구의 ‘신화’에 기초했던 점이 적지 않았다.우선 아우토반 건설이라는 아이디어부터 히틀러나 나치 정권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의 책상 서랍 속에 있던 고속도로 건설

    2024.03.15 06:00
  • 사과에 얽힌 '4대 에피소드'는 모두 거짓말?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그(파리스)는 여신들이 그의 외양간에 찾아갔을 때 이들을 모욕하고파멸을 초래할 색욕(色慾)을 그에게 준 여신을 칭찬했던 것이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24권 중에서)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그 유명한 ‘파리스의 심판’ 얘기가 등장하지 않는다.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과’와 ‘가장 아름다운 여신 선택’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신화의 내용은 호메로스 생존 당시 청중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었기 때문에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그저 작품 막판,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하는 장면에 가서야 “여신들이 파리스를 찾아갔을 때 이들을 모욕하고, 파멸을 초래할 색욕(色慾)을 그에게 준 여신을 칭찬했다”는 짤막한 언급이 나올 뿐이다.파리스의 사과를 포함에 서구 사회에서 ‘사과’를 둘러싼 유명 에피소드로는 <성서> 속 ‘아담과 이브의 사과’, 독일의 문호 쉴러의 <빌헬름 텔>에 등장하는 ‘빌헬름 텔의 사과’,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아이작 뉴턴의 사과’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재미있는 것은 이들 4가지 ‘사과 에피소드’가 모두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점이다. 종교적 믿음 혹은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그런데도 각종 에피소드 속에서 ‘사과’가 전하는 의미는 적지 않다.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쓰인 황금사과를 던지자 헤라와 아테네, 아프로디테의 3여신이 경쟁에 나섰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뽑았다는 ‘파리스의 판정’ 에피소드

    2024.03.14 12:38
  • 생각보다 길었던 영화 '파묘' 속 문신의 역사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오랫동안 문신은 한국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행위였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조폭’이나 하는 짓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병역의무를 면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거론되던 ‘특이한 행동’으로 치부됐다. 문신을 하는 것은 곱지 않은 사회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예전부터 문신은 한국에서 보기 드물었던 것일까? 의외로 한국 사회 초기 모습을 담은 기록에 ‘문신’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들은 한반도 남부 지역의 모습을 그릴 때 문신에 관한 기술을 반복적으로 남겼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과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조금씩 표현을 달리해가며 한반도의 문신문화를 전한다. 기록들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그 고장 남자들은 간혹 문신(文身)을 한 사람도 있다.(其男子時時有文身)”(<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중 한(韓) 관련 부분) “왜(倭)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男女)가 문신(文身)을 하기도 한다.(男女近倭, 亦文身)”(<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중 진한(辰韓) 관련 부분) “마한(馬韓)의 남쪽 경계는 왜(倭)에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其南界近倭, 亦有文身者)”(<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중 한(韓) 관련 부분) “변진은 왜국(倭國)과의 거리가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國近倭, 故頗有文身者)”(<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중 한(韓) 관련 부분) 특히 중국의 관찰자들은 문신 습속을 왜(倭)와 관련이 높다고 단언

    2024.03.13 06:00
  • '파묘' 흥행 뒤엔…250년간의 '피 튀긴 싸움' 있었다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영조 41년(1765년) 윤이월 23일 밤,영조가 직접 경희궁 흥화문 밖으로 나섰다. 궁궐 입직 당번이 만류했다. “깊은 밤중에 왕이 직접 궁궐 문을 나서는 것은 국체를 손상하는 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영조는 그 자리에서 옥당관(玉堂官·입직 당번)의 벼슬을 박탈하고 흥화문으로 행차했다.그곳에서 왕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명문가의 후손이었던 심정최와 윤희복이라는 두 노인이었다. 두 사람은 가문의 명예를 건 소송전을 치열하게 진행해 오던 중이었다.영조는 명망가 출신들이 지리한 소송을 계속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데 진노했다. 두 사람을 친히 심문하고는 형장(刑杖)을 가한 뒤 유배형을 명했다.일흔살이 넘은 두사람은 망가진 몸을 이끌고 귀양길을 갖고, 그중 윤희복은 며칠 뒤 사망했다.두 사람이 목숨을 건 소송전을 불사한 이유는 조상의 묏자리 때문이었다.이후 250년을 끈 묘지 소송,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산송(山訟·조상의 묘지를 둘러싼 소송)의 시작이었다.조선 시대 묘지 소송사를 상세히 다룬 <조선의 묘지 소송-산송, 옛사람들의 시시비비>(김경숙)라는 책에 따르면 국왕까지 개입한 초대형 쟁송의 시작은 파평 윤씨의 '조상 찾기'에서 시작됐다.고려시대 재상을 시낸 윤관의 후손들인 파평 윤씨들은 고려·조선 초에 사라진 윤관의 묘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조선 중기 이후 부계 조상의 분묘를 수호하고 사라진 원대 조상의 분묘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부계 의식 강화되면서 수면 위로 나타났던 것이다.파평 윤씨들은 윤관의 묘가 경기도 파주의 분수원에 있다는 옛 기록에 근거해 그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묘갈(墓碣·

    2024.03.11 12:59
  • 천장에 거울 달고 즐긴 로마인, 공중화장실 천장에 거울 달린 한국인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거울은 오랫동안 존엄하고 높은 자를 상징하는 물품이었다.동아시아 고대 사회의 청동거울부터 프랑스 절대 왕조의 대명사 루이 14세가 건설한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까지 거울은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했다.거울을 소유하고, 거울로 꾸미는 데는 실제 적잖은 권력이 동원됐다. 루이 14세는 ‘거울의 방’을 만들 당시 거울의 생산과 판권을 쥐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거울 제작 장인들을 협박하고, 뇌물로 매수해 화려한 공간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이 같은 거울은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 초창기엔 단지 안에 물을 담아놓는 것에서 거울이 출발했다고 한다. 물에 비친 모습을 실내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 실제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된 거울도 물을 담는 청동단지라는 주장도 있다.일부 지역에선 흑요석 같은 돌을 반질반질 닦아서 비친 상을 살펴보는 데서 거울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이런 형태의 거울은 기원전 60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고원에서 등장했다. 화산폭발의 부산물인 자연산 유리인 화산유리(volcanic glass)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금속 표면을 닦아서 거울로 쓰는 것은 기원전 4세기경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오늘날 일반적으로 거울이라고 지칭할 때 연상되는 유리에 금속코팅을 한 형태의 거울은 1세기에 근동 지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시대 박물학자 대(大)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서 금박 판을 활용한 거울을 언급할 정도였다.로마 시대에는 거울의 사용이 널리 확산됐다. 호스티우스 콰드라라는 로마 시대의 기인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오목거울을 건물의 천장에

    2024.03.07 06:00
  • 애덤 스미스가 예견한 의사들의 '밥그릇 챙기기'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길드의 장인 제조업자(동업조합 멤버)들은 자국 시장에서 그들의 경쟁자 수를 증가시킬 것 같은 어떤 법률에도 반대한다.(master manufacturers set themselves against every law that is likely to increase the number of their rivals in the home market.)”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폐쇄적인 길드 조직에 그 어떤 대상보다 강하게 시퍼런 날을 들이댔다.라이선스로 인한 시장 왜곡에 기대 과도한 이익을 얻던 이들이, 그들을 보호하던 장벽이 조금이라도 낮아질 기미만 보이면 강력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강력한 어조로 비판한 것이다. 그는 각종 규제 뒤에 숨어 독점력을 유지하려는 행태를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소수가 부당한 이득을 얻는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 사회 전체에 큰 해악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때로는 감정적인 가치 판단이 개입되는 표현도 주저하지 않았다. “영국의 동업조합 구성원들은 나라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피로써 나라를 지키는 자에 비해 더 큰 공헌을 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더 특별히 대우받을 이유도 없다”고 못 박은 게 대표적이다.그런 상황을 고치는 게 쉽지 않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시장 독점권을 줄이려는 시도는 강력한 무력을 독점적으로 보유한 군대를 감축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로 그려졌다. 군의 장교들이 군의 규모를 줄이는 데 반대하는 것과 동일한 열정과 일사불란함으로 동업조합 멤버들이 시장에서 경쟁자 수를 증가시킬 것 같은 법률에 반할 것이라고 묘사했다.폐쇄 시장의 문턱을 낮추는 것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는 점도, 그들의 행위가 국가나 사회에 위협적으로 될 수 있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동업조합자들은 과대 성장한 상비군

    2024.03.05 06:00
  • [토요칼럼] '정해진 미래'는 없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직전 독일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초조했다. ‘정해진 미래’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1913년 말 기준으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가상적국인 영국, 프랑스, 벨기에보다 192개 대대가 부족했다. 더 큰 문제는 동부전선이었다. 전운이 고조되면서 독일은 평시 전력을 13만6000명에서 89만 명으로 확대했지만, 1914년 말 조성될 예정이었던 러시아의 상비군 규모는 무려 150만 명에 달했다.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병사까지 합쳐봐도 러시아보다 30만 명이나 부족했다. 러시아는 1916~1917년 병력을 200만 명 규모로 키울 계획이었다. 1904년 26만982명에 불과하던 프랑스·러시아 대 독일·오스트리아 간 병력 차는 1914년 5월이면 100만 명 수준으로 벌어질 것으로 추산됐다.시간이 흐를수록 독일에 불리해 보였다. 러시아의 거대한 인구 규모와 높은 출생률에서 기인하는 군인 수 차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는 듯했다. 독일의 전략적 대처는 단순했다.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신속하게 결판을 내는 것. 다른 판단은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었다. 이에 따라 독일 지도부는 ‘긴장’이 ‘무력 충돌’로 비화하는 시점에 주저 없이 개전을 결정했다. 미래가 결정됐다는 사고에선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결정이었을 것이다.하지만 방아쇠를 당기기로 결심한 이들의 생각처럼 정말로 미래가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다른 분야와 달리 인구 문제에선 유독 ‘결정론적 사고’가 힘을 얻는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식량 생산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1798)부터 이런 식의 사고를 드러낸다. 2차 세계대

    2024.03.01 17:50
  • '세계 최강' 스파르타 무너뜨린 것은…"한국도 따라가나"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방패를 들고, 아니면 방패에 실려”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은 전쟁터로 떠나는 자식들에게 방패를 건네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짧디짧은 스파르타식 문장은 “전쟁에 승리해 방패를 들든지, 아니면 (패배해 방패를 버리고 도망가지 말고) 장렬히 전사한 뒤 방패에 실려서 돌아오라”는 뜻을 담고 있다.오랫동안 스파르타의 군대는 그리스 세계 최강의 존재로 명성을 떨쳤다.진홍색 튜닉을 걸치고, 삼손처럼 머리를 기른 채 전장을 누빈 그들은 눈에 띄는 존재였다.스파르타는 전통적으로 청년들의 경쟁을 장려해 300명으로 구성된 최정예 부대를 운영했다. 300명의 전사단에 끼지 못한 청년들은 전사단원과 싸움을 벌여 이길 경우 300명의 전사단에 낄 수 있었다. 정예 300명에 끼기 위한 상시 경쟁체제가 운영된 것이다.하지만 영광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스파르타군의 명성도 조금씩 퇴색되기 시작했다.스파르타군이 더 이상 과거의 용맹한 군대가 아니라는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75년 보에오티아에서 치러진 테기라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펠로피다스와 테베 신성대가 스파르타군을 무찔렀다.테베군이 격파한 것은 스파르타 정규 주력군이 아니라 일개 분견대들이었을 뿐이지만, 전투의 결과가 지닌 의미는 상당했다. 기원전 390년 코린트 전쟁 중 레카이움 전투에서 패한 이후 스파르타군이 처음으로 정식 호플리테스 교전에서 패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스파르타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기원전 371년의 레욱트라 전투다. 역사가 크세노폰은 이 전투 패배의 책임을 전장을 지휘한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의 탓으로 돌렸다. 현대 역

    2024.02.29 09:13
  • '당대표 코 파주기'는 명함도 못 내밀어…극한의 '아부' 경쟁사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인민의 아버지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범한 천재. 노동자의 친구이자 스승. 밝게 빛나는 태양과 같은 인간적 매력에 사회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 인물….” 인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과거 제정 러시아의 차르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부’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신문기사와 시(詩)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한 연설, 공산당의 각종 결정문, 문학비평과 과학실험 결과 발표에까지 ‘스탈린 찬양’은 소련 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는 매일 1면에 ‘강철 같은 친애하는 지도자’에게 보내는 소련 시민들의 감사편지를 싣는 게 일종의 관행이었다. 흔히 스탈린 독재체제가 확립된 시기를 프라브다에서 스탈린 생일을 대대적으로 축하한 1929년 12월로 본다.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아부 경쟁이 벌어졌다. 10년 뒤인 1939년 12월 19일. 스탈린의 예순 번째 생일에 프라브다는 “지구상에 스탈린이라는 이름에 필적할만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탈린은 자유의 횃불처럼 밝게 빛나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투쟁의 깃발처럼 나부낀다.…스탈린은 현재의 레닌이다! 스탈린은 당의 두뇌요 심장이다! 스탈린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투쟁하는 수백만 명의 기치다”라고 공표했다. 이후 그의 생일만 되면 낯뜨거운 찬양 문구가 신문 지상을 도배했다. 신문기사뿐 아니라 “모스크바는 잠들어 있다./ 깨어 있는 이는 오직 스탈린뿐/ 이 늦은 시각에~/ 스탈린은 우리를 생각한다./…초원의 작은 소년은 스탈린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크렘린의 답장을

    2024.02.28 06:00
  • 십자군 전쟁은 인구변화가 일으켰다?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신께서 원하신다. (Deus le volt)”1095년 11월 27일.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교황 우르반 2세의 연설을 듣던 군중들은 어느 순간부터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신의 영광’을 지상에서 구현하기 위한 열정이 운집했던 군중들을 휘감았다.군중들을 자극한 우르반 2세의 연설은 튀르크인들의 침입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동방 기독교도들을 도와야 하며 더는 이교도가 동방의 기독교 영지를 침입해 성지와 교회를 휩쓸고 다니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교황의 열변을 들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전체 기독교 세계가 동방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해야 한다고 느꼈다.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들은 이제 내부에서 치고받고 싸우며 살육과 분쟁을 이어가던 것을 멈추고 ‘올바른 전쟁’. 즉 신을 위한 일에 나설 것이었다.이처럼 십자군 전쟁의 종교적, 정신적, 감성적인 것으로 촉발됐다.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을 따져보면 그 배경엔 경제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는 법. 중세 유럽인들이 그처럼 대외 공격·팽창의 목소리에 쉽게 감응하고 그런 공격적인 움직임이 오래 지속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당시 유럽은 인구가 빠르게 늘기 시작하던 때였다. 온난한 기후와 삼포제 등 농업기술의 개선 덕에 농업생산량이 늘어난 영향이었다. 자연스럽게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의 전 기간은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던 때와 겹쳤다.인구 관련 사료가 상세하게 남아있는 잉글랜드의 경우, 12세기 하반기 0.2%였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13세기가 되면 0.75%로 상승했다. 12세기 프랑스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0.39%, 독일이 0

    2024.02.27 06:00
  • 로마 제국의 '노총각세'…독특한 이 세금의 정체는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노총각세’(Aes uxorium).독특한 이름 덕에 고대 로마 특유의 세금 제도는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됐다. 현대 로마사 연구의 기틀을 다진 테오도르 몸젠 이후 수많은 학자가 이 세금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노력해왔다.하지만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불분명하다. 제도 도입 이후 지속해서 세금이 부과된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모두 자료가 부실한 탓이다.분명한 것은 ‘노총각세가 도입됐었다’라는 단 한 가지 사실이다.기원전 403년 호구감찰관이었던 푸리우스 카밀루스는 전격적으로 노총각세를 도입하며 사실상 로마 시민들의 결혼을 의무화했다.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결혼하지 않은 남성에게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제도의 도입 취지는 ‘인용의 인용’ 형식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제도가 시행된 지 한참 뒤인 기원후 1세기 로마의 역사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로마 시민은 아이를 양육함으로써 부모에 대한 감사의 빚을 갚는 것”이라며 “남편과 아버지로서 명예롭지 않은 이들은 국가의 금고에 돈을 지급하는 것으로서 부모로부터 받은 빚을 갚아야 했다”며 제도 도입의 명분을 설명했다.실질적으로 노총각세에 해당하는 세금이 부과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기원전 18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전제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개혁의 목적으로 혼인과 부모의 의무, 간음 등과 관련한 법 제도를 대거 정비했다.법 개정의 이면에는 이탈리아반도 내에서 본토인들의 인구를 증대시켜야겠다는 의도도 담겨있었다.당시 도입된 법 중에는 아이를 세 명(또는 네 명) 이상 낳으면 각종 혜택이 부과되는 ‘세 아이 법(jus trium liberorum)’도 있었다. 유아 사망률이

    2024.02.26 06:00
  • 나라 팔고, 남의 처 빼앗고…역사 속 '내기 바둑'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기간 455~475년)은 바둑을 좋아했던 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과 ‘도미(都彌) 열전’에 각각 바둑과 얽힌 일화가 전한다.그리 많지 않은 개로왕에 관한 정보 중 바둑에 관한 내용이 공통으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의 ‘바둑 사랑’은 유독 남달랐던 듯하다.하지만 그의 바둑 에피소드들은 긍정적이라기보다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내용으로 그려진다. 왕과 평민의 ‘내기바둑’은 최고 권력자가 평민의 처를 빼앗는 수단이었다. 바둑에 빠져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던 그의 취미를 파고든 것은 적국 고구려의 스파이였다. 그렇게 바둑은 망국의 문을 여는 단초가 됐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9월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첩자로 승려 도림(道琳)을 점찍었다. 백제 개로왕(근개루(近蓋婁))이 ‘장기와 바둑’(博奕)을 두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바둑은 적극 권력의 최상층부에 침투하는 무기가 됐다. 도림은 대궐 문에 이르러 “신이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바라건대 대왕의 곁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라고 개로왕의 자존심을 건드렸다.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했다(甚親昵之, 恨相見之晩)”고 전해진다.개로왕의 마음을 연 도림은 대규모 토목사업을 유도해 ‘나라의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지도록’해 고구려의 침공 길을 열었다고 전해

    2024.02.25 06:30
  • 정적 제거의 끝판왕…뛰는 푸틴 위의 나는 스탈린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코바, 왜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지?” 1938년 니콜라이 부하린은 혁명 동지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숙청돼 총살되기 직전 쓴 짧은 편지에는 스탈린의 옛 이름이자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코바’라고 부르며 원망 섞인 마음을 드러냈다. (조지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카즈베기의 소설 <부친살해>에 나오는 캅카스 지방 의적에서 이름을 딴 ‘오시프 코바’는 스탈린 본인은 물론 동료들도 자주 썼던 이름이다. 스탈린이라는 이름도 가명이다.) ‘대량학살자’ 또는 ‘20세기의 괴물’이라 불린 스탈린은 레닌이 “권력을 잡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쉽지만 통치하기는 가장 어려운 나라”라고 평했던 러시아를 30년 가까이 홀로 지배했다. 스탈린은 지하정치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잠입과 은폐, 배반은 스탈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특질이었다. 그는 러시아 사회 곳곳에서 음모가 횡행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을 때도 항상 “음모가 있지 않을까”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쓸모가 있는 자들에겐 필요한 동안만큼은 후하게 베풀었고, 방해되는 자들은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 책략으로 쓰러뜨렸다. 스탈린은 “무자비했고 기회주의적이었으며 전술적으로 유연했고, 사사로운 생존을 위해 비타협적으로 정치적 행보를 이어간”인물(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스탈린이 자란 환경은 척박했다.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조지아의 고리 지역은 살벌한 정글 같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도 스탈린은 가난하지만 강한 아이였다. “우리는 그가 무서워서 피했다”라는

    2024.02.18 06:30
  • 손흥민·이강인 식사 자리 다툼을 스파르타인이 봤다면…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고대 그리스, 특히 스파르타에서 공동생활은 의무였다. 스파르타 구성원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공동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식사도 같이하고, 초라한 진흙 벽돌로 지은 집에서 잠도 같이 잤다. 거의 완벽한 ‘병영사회’가 스파르타 사회를 정의하는 특질이었다.스파르타의 남성 소년들은 20세까지 아고게(ἀγωγή)라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했다. 20세부터 30세까지는 10년간 중앙 기숙사에서 공동으로 숙박을 같이했다. 또 20세 이후 40년간은 ‘페이디티아(φειδίτια)’라는 식사 공동체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스파르타의 의무 복무기간이 60세까지였던 만큼 자유로운 개인 생활은 평생 불가능한 일이었다.공동식사에서 예외는 없었다. 2명의 왕을 뒀던 스파르타 사회에서 왕들도 제사 의식 같은 특별한 사유가 없이는 공동식사에서 빠질 수 없었다.함께 식사하고, 함께 훈련받고, 함께 전투하는 이 공동체는 격렬한 운동으로 ‘시장이 반찬’이 아니면 먹기 힘들다는 악명 높은 ‘멜라스 초모스(μέλας ζωμός)’라는 ‘검은 국(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공동체 의식을 키웠다. '검은 죽'의 악명은 대단해 지금도 서양 사회에선 '스파르타 수프(spartan soup)'는 볼품없고 맛없는 음식의 상징처럼 쓰이기도 한다.스파르타인들은 왜 이렇게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을까. 플루타르코스 등에 따르면 BC 7세기의 전설적 입법자 뤼쿠르고스는 부를 축적하고 사치를 누리는 것을 없애기 위해 사실상 화폐의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토지는 추

    2024.02.17 06:28
  • [데스크 칼럼] '근본' 말고 '기본'을 따지자

    조선 왕조 500년간 유학을 숭상했지만, 조선의 식자층이 유교 발전에 기여한 성과는 초라하다. 세계 철학사나 동양 사상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만한 결과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상복을 몇 년간 입느냐’(예송논쟁),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냐 다르냐’(호락논쟁),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중 누가 서열이 높으냐’(병호시비)와 같은 공허한 입씨름만 거듭했을 뿐이다. 뿌리 깊은 '줄 세우기'유교의 본토 중국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 합리적 분석을 강조하는 고증학이 교차하며 근대적 사유가 싹을 틔우고, 변방 일본에서 오규 소라이(荻生徠)가 공맹(孔孟)의 가르침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때 조선에선 이미 수백 년 전 유행이 끝난 성리학에만 매몰됐다.사회 엘리트가 총력을 기울여 유학에 ‘올인’했던 조선에서 학습의 결실이 이처럼 초라한 이유는 무엇일까. ‘책 속에 천종의 봉록이 있다(書中自有千種祿)’(진종황제 ‘권학문’)는 문구에 충실하게 출세를 위한 수험 공부에만 집중한 탓이 클 것이다.그리고 이처럼 부실한 기초라는 부끄러운 실상은 허례허식에 대한 집착과 편 가르기, 줄 세우기로 가렸다. 노론, 소론, 벽파, 시파, 완론, 준론 식으로 집권층의 패거리는 세분돼 갔다. 이렇게 너와 나를 가르는 기준은 ‘근본 따지기’였다. 실력과 내용보다는 핏줄이 중요했고 부모가 누군지, 스승이 누군지, 자란 곳이 어디인지 따위가 우선시됐다.민망한 과거를 되짚어본 것은 요즘도 옛 치부가 오버랩되는 일을 곳곳에서 마주하기 때문이다. 수험생 시절부터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로 시작

    2023.12.17 17:39
  •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에 수백 곳에서 학살이 이뤄졌다 [책마을]

    “재단사, 대장장이, 목공, 석공 등 모든 기능공과 노동자는 왕의 재위 20년(1346~1347년) 혹은 그 언저리 시절 임금보다 더 받으면 안 된다. 만약 더 받는다면 투옥할 것이다.” 1349년 영국 에드워드3세 자문위원회는 ‘노동자 조례’를 작성해 근로자 임금을 흑사병 창궐 이전 수준으로 붙들어 매려 했다. 흑사병이 덮쳐 인구가 급감한 영향으로 임금이 치솟고 물가가 거침없이 뛴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상한선 이상 임금을 받는다면 구금형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엄혹한 법규만으로 임금 상승의 도도한 물결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당수의 장원 기록부는 근로자들이 각종 ‘조례’와 ‘법령’이 규정한 것을 크게 웃도는 임금을 받았음을 증명한다. <중세 서유럽의 흑사병>은 국내 중세사 전문학자가 흑사병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리한 학술서다. 어느덧 희미한 기억이 된 코로나19처럼 인류사에 큰 충격을 입혔지만, 여전히 실체가 불분명한 중세 대역병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살펴본다. 페스트(페스티스)나 전염병(에피데미아), 죽을병(모르탈리타스) 등으로 불리던 역병에 ‘검은 죽음’이라는 뜻의 라틴어 ‘모르스 니그라’라는 이름을 붙인 이는 당대의 연대기작가 시몽 드 쿠뱅이었다. 화농성 농양 탓에 사타구니 등에서 ‘타는 듯한 고통’을 유발하는 증상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명칭이었다. 강렬한 병명만큼이나 전염병이 중세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은 컸다. 당대의 문헌들은 1348년 여름 피렌체 인구의 4분의 3이 사망했고, 케임브리지셔 지역 인구의 80% 이상이 죽었다고 전한다. 과장을 고려해도 1347~1351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대재난은 재앙을 불

    2023.11.23 10:05
  • [데스크 칼럼] '사기 왕국'을 낳은 '공짜 심보'

    단테 알리기에리가 묘사한 지옥 편에는 사기꾼이 득시글거린다. 생전 직업 기준으로는 성직자와 정치인이 지옥 거주민 중 가장 흔하지만, 죄목으로 분류하면 사기범의 수가 압도적이다. 아첨꾼, 허풍쟁이, 위선자, 도둑, 위조범 등의 형태로 주변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뱀의 영혼’들은 지옥의 똥물 속에서 끝없이 허우적댄다. “이 저주받은 영혼아! 이곳에 갇혀 영원토록 통곡하여라!”라는 단테의 외침은 사기 피해자의 절규가 담긴 듯 생생하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단테가 다룬 ‘지옥도’ 속 사기꾼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얼마 전에도 한 사기극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공짜' 권하는 사회 남현희 전 펜싱 국가대표가 재벌 3세를 사칭한 전청조 씨와 얽힌 사건은 소위 ‘막장 드라마’가 무색할 정도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재벌 가문의 혼외자로 개인 은행 계좌 잔액만 51조원에 달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에 혹해 적잖은 이들이 지갑을 열었다. 여자를 남자라고 믿게 할 정도로 사람의 정신을 쏙 뺀 데에는 초호화 레지던스에 살면서 수억원짜리 고급 차량과 명품 가방을 척척 선물하는 전씨의 ‘경제력’이 큰 몫을 했다. 그 재력이라는 것이 갈취한 돈으로 세운 모래성이라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허풍쟁이와 야바위꾼, 위조사범의 일인다역(一人多役)을 수행한 전씨의 ‘사기 캐릭터’만으로 황당극의 전말을 설명할 수는 없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피해자’들의 탐욕, 기만행위를 깨달았더라도 애써 현실에 눈감은 ‘공범’들의 허영이 황당극을 지탱한 또 다른 기둥이 아닐까 싶다. 전씨에게 돈을 맡기며 한배를 탔던 이들은

    2023.11.07 17:54
  • [데스크 칼럼] 부메랑으로 돌아온 '친일파 몰이'

    “스탈린이 만든 굴락(Gulag·강제수용소)이 아우슈비츠의 원형이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는 일찍이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거울을 보고 마주한, 뒤집어 놓은 판박이로 봤다. 죽기 살기로 총력전을 치렀던 극우와 극좌세력은 외견상 모든 것이 대비되는 상극의 존재로 여겨졌지만, 실상은 서로를 모방하며 비슷한 ‘괴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때아닌 '역사 논쟁'놀테는 두 전체주의 체제의 상호 따라하기 양상을 600쪽이 넘는 라는 책에 상세히 담았다. 그에 따르면 소련의 수용소군도를 본 후에야 나치는 유대인을 강제수용소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유대인 절멸 정책의 뿌리에는 볼셰비키의 계급 학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체제 선전에 앞장선 양국의 기관지들은 마치 서로를 베낀 듯 비슷한 극단적 용어를 동원하며 상대방을 악마화했다. 40여 년 전 독일 역사학계에 큰 논쟁을 일으킨 놀테의 주장을 떠올린 것은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어지고 있는 역사 논쟁과 비슷한 점이 적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의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추진과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움직임을 계기로 얼마 전부터 역사적 사실과 역사관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졌다. 특히 홍 장군의 사례가 논란의 핵심이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 군가를 작곡하고 인민군 선무활동에 앞장선 이력 탓에 손쉽게 시비(是非)를 가를 수 있는 정율성과 달리 홍 장군의 행적은 보기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과 평가가 가능해서다. 주목되는 점은 최근의 역사 논쟁에선 공수가 교대됐다는 것. 야권을 비롯한 소위 진보 진영은 오랫동안 반대 진영에 ‘친일파’의 낙인을 찍어왔다. 그간 진보 진영은 복잡하게 뒤얽

    2023.09.27 16:58
  • [책마을] 우리는 북한의 핵개발 야욕을 너무 모른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북한 핵과 관련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북핵에 대해 논하는 많은 이들이 구체적으로 북한의 핵이 어떤 특성을 지녔으며 어떤 경로로 개발됐는지를 도외시한다. 하지만 뭉뚱그려 핵무기 혹은 핵폭탄이라고 지칭하고 넘어갈 때 놓치는 문제는 과연 없을까. 은 베이징사범대, 베이징대, 중국과학원, 옌볜과학기술대 등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권 과학기술 전문가인 저자가 북한의 핵 개발 과정과 현재의 기술 수준, 북한 정권이 추구하는 핵전략을 냉철한 과학의 객관적 언어로 분석한 책이다. 정치적 해석 위주의 북한 핵 담론장에 ‘기초부터 확인하라’고 일침을 놓는다. 북한의 핵은 오랜 개발 역사를 지녔다. 북한이 1990년대 이후 ‘벼락치기’로 핵 개발에 뛰어들었다는 일반의 선입견과는 거리가 멀다. 북한의 핵 연구 인력들은 1956년 모스크바에 설립된 연합핵연구소(JINR)에 참여해 일찍부터 관련 기술을 확보했다. 1960년대에 이미 300명 넘게 인력을 파견하며 200여 명의 중국을 능가했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비서는 “북한의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은 1980년대부터 시작됐고 1990년대 초반에 성공했다”고 못 박았다. 마침내 2006년엔 풍계리에서 최초의 지하핵실험을 강행하며 세계에 충격을 줬다. 주목할 점은 북한이 감행하는 핵실험은 정치적 의도보다는 핵무기의 기술적 성능을 검증하고 개선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3~5차 핵실험은 핵탄두 소형화와 표준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고, 4~6차 실험은 수소탄 개발과 연관됐다. 남북관계와 대미 전략은 북한에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같은 맥락에서 북한이 7차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저자는 예

    2023.09.2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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