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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 고경봉 기자
    고경봉 기자 증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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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경제신문 스타트업부장입니다.

  • [데스크 칼럼] 잡스가 말했다 "think big"

    2007년 6월 18일로 기억한다. 세계 증시가 유동성 파티를 즐기던 중이었다. 코스피지수는 이날 사상 처음 1800을 돌파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의 헤지펀드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상품에 투자했다가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가 동요하던 그 며칠 사이에 두 개의 제품이 시장에 연이어 나왔다. 하나는 엔비디아의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인 ‘쿠다’였고, 다른 하나는 애플의 ‘아이폰’이었다. 인공지능(AI)과 스마트폰 시대는 그렇게 금융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가보지 않은 길을 뚫은 기업들당시 엔비디아와 애플이 맞서야 할 상대는 정보기술(IT)업계의 ‘절대 지존’들이었다. 엔비디아가 몸담은 세계 반도체시장은 인텔 천하였다. 중앙처리장치(CPU) 분야에서 인텔 점유율이 80%에 달했다. 컴퓨터 제조사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인텔 CPU가 장착됐다는 의미인 ‘인텔 인사이드’가 곧 브랜드였다. 그런 인텔에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만드는 엔비디아가 “CPU 시대를 끝내겠다”며 도전장을 냈다.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이 인텔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던 때였다.애플이 진출한 휴대폰 분야에선 노키아가 독주 중이었다. 글로벌 점유율이 2위 모토로라, 3위 삼성전자, 4위 소니에릭슨을 합친 것보다 높았다. 당시 애플도 빅테크 축에 속했지만, 노키아에 견줄 수준은 아니었다.가보지 않은 길은 험난했다. 엔비디아가 내놓은 쿠다는 수년간 ‘돈 먹는 하마’였다. 그 효용성이 주목받은 것은 6년이 지나서였다. 애플도 휴대폰의 강자 반열에

    2024.02.28 18:05
  • [데스크 칼럼] 코리아디스카운트의 본질

    이렇게 주가 띄우기에 열일 하는 정부가 있었을까.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 국정 목표의 1순위가 ‘주가 부양’인 듯싶다. 대통령이 새해 첫 행보로 증시 개장식 참석을 택한 것 자체가 초유의 일이다. 여기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방침을 밝히더니 지난 17일에도 한국거래소를 찾아 고소득자의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가입을 허용하고, 기업들에는 주가 부양 대책을 의무적으로 내놓으라고 했다. 지난해 말엔 공매도를 금지하고 대주주 주식 양도소득세 기준도 높였다. 그러면서 “자본시장 규제를 혁파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고 했다. 수급으로 지수 올리겠다는 발상이쯤 되면 새해 코스피지수가 호응해서 달릴 만도 하다. 그런데 공교롭게 국내 증시는 연초부터 내리막을 걷고 있다. 중국·대만 등 중화권 증시만 빼면 세계 주요국 중 하락 폭이 가장 크다. 장기적으론 다를 것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런 정책으로 해소될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면 이미 십수 년 전 사라져야 했다. 수급을 조절해 증시를 올리겠다는 접근법부터 말이 안 된다. 국민연금만 봐도 답이 나온다. 10년 전 국민연금은 500조원이 채 안 됐다. 지금은 1000조원이 넘는다. 10년 전 100조원이던 퇴직연금은 300조원이 됐고, 생명보험사들의 자산도 100조원 넘게 늘었다. 10년 전 470만 명 남짓이던 개인투자자는 최근 1400만 명을 넘어섰다.이런데도 지난 10년간 코스피지수 상승률은 고작 25%다. 미국과 일본 등의 증시가 2배 이상 치솟는 동안 말이다. 이런 상황에 부자들에게 연 4000만원짜리 ISA에 가입하라고 허용해주고, 공매도를 금지하고, 기업이 부양 대책을 내놓으면 주가가 오를까.과거 정부

    2024.01.28 18:05
  • [천자칼럼] 독재자들의 공갈

    “우리 군은 마침내 전 세계에 우뚝 섰다. 지난해 시작한 공세를 즐겁게 마무리할 준비가 됐다. 영국은 이제 붕괴할 것이다. 영웅들에게 감사한다.”아돌프 히틀러의 1941년 신년 연설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독일 국민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이 연설을 한 것은 독일이 영국 침공 계획인 ‘바다사자 작전’을 포기한 직후다. 프랑스를 함락하고 나서 야심 차게 영국을 공격했다가 저항에 밀려 물러서기로 한 것이다. 서유럽을 모두 집어삼키겠다는 히틀러의 야욕은 사실상 무산됐다. 그런데도 승리 소식을 의심한 독일 국민은 없었다. 히틀러는 4년 후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까지도 “승리가 눈앞에 있다”는 허언을 멈추지 않았다.전쟁이나 갈등 상황에서 독재자들의 메시지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구심점이 흔들리거나 여론이 악화할수록 메시지는 단호해진다. 승리와 영광이 눈앞에 있다는 기대, 영웅에 대한 헌사도 반복된다. 국민이 이런 ‘공갈’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것은 외부 정보를 차단하고 언론을 통제한 상황에서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발언을 검증하거나 견제할 정치 시스템도 부재한다.올해 연초부터 북·중·러의 지도자들이 일제히 강경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핵 무력을 포함해 모든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 남조선을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에 온건한 목소리를 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 총통 선거가 다가오자 “조국 통일은 역사적 필연”이라며 발언 수위를 높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 차

    2024.01.01 17:34
  • [천자칼럼] 뜨거운 '워크 바이러스' 논쟁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친구가 울분을 터트리더군요. 딸이 학교에 다녀오더니 ‘조지 워싱턴은 건국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노예 소유주에 불과하다’고 했답니다. 요즘 학교가 ‘정치적 올바름’이니 하면서 이런 걸 가르칩니다.”얼마 전 한 방송에서 이렇게 세태를 한탄한 주인공은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다. 그가 요즘 자주 쓰는 대표적인 표현이 ‘워크(woke) 바이러스’다. 워크는 ‘정치적 올바름(PC)’을 추구하고 인종, 성 정체성, 문화 등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이른바 ‘깨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 깨시민주의가 공격적으로 변질하고 바이러스처럼 증식하면서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머스크는 이런 워크 바이러스를 막는 방역 전사를 자처하고 있다. 워크주의에 적극적인 기업인 디즈니와 전면전을 벌이는 게 대표적이다. 디즈니가 머스크가 최대주주인 SNS 엑스(X)의 광고를 중단하자, 테슬라는 자사 전기차의 디즈니플러스 앱을 삭제했다.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수백 명의 흑인 노예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교육 현장에서 벌어진 ‘국부(國父) 논란’에도 참전했다. 시대적 맥락을 외면한 채 업적을 폄훼한다고 일갈한 것이다.반(反)워크주의 소신은 그의 비즈니스에도 반영된다. 챗GPT 등 인공지능(AI) 챗봇들이 편향된 답변을 내놓는다고 비판해온 머스크는 반워크 성향을 자신한 챗봇 ‘그록’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록마저 워크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평가를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학습 정보에 스며든 PC주의의 그림자를 못 벗어났다는 평가다.워크주의 논쟁은 한국에서도 뜨겁다. 페미니즘, 환

    2023.12.24 17:35
  • [천자칼럼] 9회 말 투아웃 대타 한동훈

    안타를 치더라도 뚱뚱한 몸집 때문에 매번 1루에서 멈추던 타자가 있다. 한번은 마음잡고 휘두른 방망이에 공이 뻗어나가자 타자는 안 하던 짓을 한다. 1루를 돌아 2루로 향한 것. 하지만 그 순간 ‘선을 넘었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타자는 허둥지둥 1루로 몸을 돌리다가 넘어졌고 상대 수비진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반전은 그다음이다. 1루수가 타자를 일으켜 세우더니 2루 쪽으로 가라고 엉덩이를 툭 쳤다. 홈런을 쳤다는 사실을 타자 본인만 몰랐던 것이다. 영화 ‘머니볼’에서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이 장면은 자신이 그어놓은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한방’의 의미를 얘기한다.실제로 꽤 잘나가는 타자들도 중요한 타석에서 자신에 대한 불신에 자주 지배된다고 한다. 9회 말 투아웃과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상대의 구종이 어떨지 고심하고, 내심 투수의 실투도 기대해본다. 공이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오만가지 생각에 몸이 굳는다. 포수 미트에 공이 박히고 주심의 힘찬 삼진 콜이 울려 퍼진 후에야 한심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중심 타선의 중압감은 그렇게 크다.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직을 수락하면서 현 상황을 야구에 빗대 주목받았다. “9회 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면 원하는 공이 들어오지 않았어도, 스트라이크인지 애매해도 후회 없이 휘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 국민의힘은 꽤 큰 점수 차로 리드를 빼앗긴 상황이다. 안 그래도 팀은 연패로 패배 의식에 절어 있고, 선수단의 내홍에 팬들마저 등을 돌렸다.이런 상황에 한 전 장관이 나서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2023.12.22 17:50
  • [천자칼럼] 한·일 엔터 동맹

    “국내 영화산업이 홍콩 영화에 밀려 존립 위기에 처해 있는데, 막강한 자본을 갖춘 일본 영화까지 수입을 검토한다니 문화 종속이 우려된다.”1992년 7월 국내 일간지 기사의 한 대목이다. 이즈음 아시아 영화산업의 종주국은 단연 일본과 홍콩이었다. 각각 두 나라의 최대 배급사인 도호와 골든하베스트가 그 정점에 있었다. 영화 시작과 함께 나오는 이들의 로고는 아시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나타내는 심벌이었다. 골든하베스트 정문 앞에는 이 회사 영화를 들여오려는 한국 영화사가 줄을 섰다. 한국 정부가 일본 문화를 개방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도호에도 일본 영화를 선점하려는 한국 배급사와 대기업이 몰려들었다. 국내 영화산업은 곧 고사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다.30여 년 전 한국 문화산업의 열악한 상황을 곱씹다 보면, 최근 CJ ENM과 도호의 협약이 얼마나 상징적 사건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도호의 미국 법인이 CJ ENM의 미국 법인에 2900억원을 투자해 2대 주주에 올라서는 내용의 계약이다. 한국과 일본의 최대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손잡고 미국 시장을 공동 공략하는 모양새지만, 실제론 도호가 CJ ENM에 “수업료를 낼 테니 해외 진출 경험을 공유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도호의 콘텐츠를 리메이크하거나 새로 만드는 작업도 CJ ENM이 맡을 계획이다.도호는 1950년대부터 <7인의 사무라이> <카게무샤> 등 세계적 반열에 오른 작품을 배급하며 글로벌 유통망을 뚫어왔다. 지금도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 등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들의 작품 배급을 전담한다. 이런 회사가 이제는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노하우를 배우고, 자사의 콘텐츠를 재가공해 세계에

    2023.12.12 17:57
  • [천자칼럼] 200억원짜리 장갑차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자동차는 프랑스의 슈퍼카 브랜드인 부가티가 2019년 내놓은 ‘라 부아튀르 누아르’라는 모델이다. 기본 가격이 150억원이고, 옵션에 따라 200억원까지 치솟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가격대의 차량이 있다. 출력은 1000마력으로 누아르의 1500마력보다 낮다. 속도는 하늘과 땅 차이다. 누아르는 최고 시속이 420㎞에 달하지만 이 차는 65㎞에 불과하다. 연비는 ‘기름 먹는 하마’ 수준인 L당 3㎞다. 그런데도 어떻게 세계 최고가 차량과 가격이 같을까.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차’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무기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고 탱크를 파괴하는 대전차 지뢰도 무력화한다. 심지어 날아오는 미사일도 탐지해 요격한다. 여기에 첨단 센서와 무인 작동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막강한 화력은 덤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내놓은 장갑차 ‘레드백’ 얘기다. 한화는 최근 호주 군에 레드백 129대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총 3조1500억원어치로, 대당 약 200억원 꼴이다. 항공기나 선박 등을 제외하고 지상의 ‘탈 것’으로만 한정하면 역대 최고가 수출품이다. 수주 과정도 극적이다. 호주 정부가 처음 장갑차 도입 계획을 발표한 2018년 당시 경쟁사인 독일 라인메탈의 장갑차 링스는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데 비해 한화는 도면조차 없었다. 한화 직원들이 장난감만 한 모형을 들고 설명회에 참여하면서 창피함에 고개를 못 들었다고 한다. ‘뭐 이런 회사가 있나’ 싶던 호주 군 장성들은 불과 10개월 후 자신들의 요구 내용을 꼼꼼히 담은 장갑차가 눈앞에 나타나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술력도 놀랍지만 전 세계에서 부품을 적시에 조달하는 비결이

    2023.12.08 17:58
  • [천자칼럼] 中 알리·테무의 공습

    한국 기업이 개발한 완구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은 아이템은 ‘그립볼’일 것이다. 1991년 한 중소기업이 내놓자마자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그해 세계 최다 판매 완구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그립볼이 뭐냐고? 벨크로(찍찍이)로 된 원형 판을 글러브처럼 손에 끼고, 캐치볼 하듯 공을 주고받는 놀이기구라고 하면 다들 알 것이다. 지금도 이 완구를 가지고 노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오리지널 제품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걸 만든 국내 기업은 2년 후 부도를 맞았고 제품 명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산 모조품이 수출 시장과 국내 시장을 잠식한 탓이다. 30년 전 완구로 시작한 중국산의 국내 침공은 이제 전 산업을 집어삼킬 기세다. 주요 소비재에 이어 산업용 부품까지 장악하더니 대형마트, 홈쇼핑, 온라인 플랫폼 등 유통산업 전반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그 선두에는 각각 중국 1, 2위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와 핀둬둬의 쇼핑 앱인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가 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소비자들이 중국 온라인 쇼핑몰에서 중국산 제품을 직접 구매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저질 제품이 많았고 고객서비스(CS) 부문의 악명도 높았던 영향이다. 중간 유통 기업들이 검증된 제품을 골라 국내 쇼핑몰에 들여와 파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품질에서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붙자 중국 소비재 기업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자국 쇼핑 앱을 통해 각국 소비자를 직접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 중국 직구 앱의 인기는 열풍 수준이다. 알리의 국내 사용자는 지난 10월 기준 613만 명으로 1년 사이 두 배 넘게 늘었다. 지난 7월 국내에 상륙한 테무도 사

    2023.12.04 17:57
  • [고경봉 칼럼] 공항, 철도 따라 폭주하는 포퓰리즘

    아무리 봐도 희한하다. 광주광역시와 대구광역시를 잇는 철도를 만들겠다는 ‘달빛철도 특별법’ 말이다. 이 철도는 특별해서 건설할 때 남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공공사업을 할 때 경제성 등을 미리 검증하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시켜달란다. 그것도 모자라 철도 역사의 주변 개발 사업도 예타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 건설 과정에서 지역 주민을 우선 참여시켜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담긴 44개 신규 노선 중 오로지 이 철도만 이렇게 대우해달라고 한다. 제일 황당한 대목은 정부 계획인 6조원짜리 단선 일반 철도는 성에 안 차니, 11조3000억원을 들여 복선 고속철도를 지어야겠다는 것이다. 국내 철도 건설 역사상 유례없는 특혜 조항들로 버무려진 이 특별법이 지금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그것도 무려 사상 최다인 261명의 국회의원이 공동 발의했다. 달빛철도의 경제성이 얼마나 낮은지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다. 동일 노선을 오가는 광주대구고속도로만 봐도 답이 나온다. 이 도로의 하루 통행량은 전국 고속도로 평균 통행량의 절반 이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광주 송정역에서 서대구역까지 2시간 정도면 간다. 기차를 타면 30~40분가량 단축되겠지만, 역까지 이동 시간 등을 감안하면 무의미한 차이다. 논란이 커지자 강기정 광주시장과 홍준표 대구시장이 “그럼 고속철도 대신 일반 복선 철도로 짓자”고 반발짝 물러섰다. 그런데도 건설비용이 기존 정부안보다 45% 많은 8조7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 법안이 포퓰리즘의 ‘끝판왕’인 이유는 단순히 경제성이 낮은 공공사업에 세금을 쏟아붓기 때문만이 아니다. 문제는 ‘특별법’이라는

    2023.12.03 17:57
  • [천자칼럼] 중앙은행 폐쇄

    중앙은행은 정권에 마약과 같다. 기준금리를 정하고, 공개시장을 운영하고, 발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필요할 때 돈을 풀 수단이 된다. 그렇게 정부가 중앙은행을 쥐락펴락하다가 물가가 폭등해 경제를 말아먹은 사례가 부지기수다. 주요 국가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절대 원칙으로 삼는 이유다. 그렇다고 중앙은행 역할을 금리와 통화량 조절로만 제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성장률과 일자리 지표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특히 국지적 금융위기의 세계적 확산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 중앙은행이 구원투수로 나서야 할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한국은행도 당초 ‘물가안정’만을 목표로 삼다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2011년 ‘금융안정’을 추가했다. 문제는 그 적정선을 지키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은행만 봐도 그렇다. 정부의 입맛에 따라 휘둘린다고 ‘기획재정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별명이 붙었다가, 통화정책이 정부 정책과 괴리되면 혼자 고고한 척한다고 ‘한은사(寺)’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중앙은행의 역할은 세계 각국의 딜레마다. 그런 측면에서 중앙은행을 폐쇄하겠다는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은 이래저래 주목받는다. 아르헨티나처럼 웬만큼 경제 규모를 갖춘 나라가 중앙은행을 두지 않는 사례는 사실상 없다. 밀레이 당선인의 얘기는 정부가 직접 통화정책의 그립을 쥐겠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팔라우 등 미국 달러를 쓰는 초미니 국가들이나, 유로를 도입한 유럽연합(EU) 회원국처럼 외부 통화를 쓰는 대신 통화정책을 사실상 포기하겠다는 얘기일까. 그는 실제로 아르헨티나 페소 대신 달러를 가져다 쓰겠다는 뜻을 내비친 바 있다. 아직 뚜

    2023.11.26 17:39
  • [천자칼럼] 여야의 예타 농락

    대규모 공공사업에는 경제성 등을 따지는 예비타당성 조사(예타)를 미리 하도록 돼 있다. 긴급한 상황이나 정책적으로 필요한 사업에만 예외적으로 이를 면제해준다. 하지만 예타 면제는 취지와 다르게 선심성 카드로 남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각 지방의 공공사업 47건(36조원 규모)에 대해 예타를 면제해줬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내용을 봐도 경제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거센 비난이 일었지만, 당시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은 ‘지방 균형 발전’ 논리로 깔아뭉갰다. “경제성만으로 평가하면 사람이 적은 지방 도시들은 불이익을 받게 되니 그런 곳의 사업들은 예타를 면제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민주당이 최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위에서 눈길을 끄는 법안 하나를 강행 처리했다. “인구 50만 명 이상의 접경지역이 포함된 대도시권 광역교통시설 확충사업은 예타를 면제해준다”는 내용이다. 왜 50만 명이 기준인지는 설명조차 없다. 지방 도시도 안 된다. 오로지 서울과 맞붙은 접경지역의 50만 명 이상 도시만 광역교통시설을 확충해주겠다는 것이다. 경기 고양, 김포, 파주 등만 대상이다. 한마디로 “서울지하철 5호선의 김포 연장 사업을 예타 없이 해주겠다”는 것이다. 지난 총선 때는 “수도권에 비해 낙후된 지방만 예타를 면제해주겠다”고 했다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는 “수도권 도시만 예타를 면제해주자”고 했으니 얼마나 코미디 같은 노릇인가. 법안에 김포를 언급하지 않고 에둘러 표현한 것을 보면 본인들도 무안했나 보다. 또 황당한 것은 이 법안이 지난 2월 제안됐지만, 그동안 논의조차 안 됐다

    2023.11.24 17:40
  • [천자칼럼] 축하받은 '우주선 발사 실패'

    “우리에겐 딱 세 번 쏘아 올릴 정도의 여유 자금밖에 없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알죠?” 스페이스X가 첫 로켓인 팰컨1 발사를 앞두고 있던 2005년. 스페이스X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주요 기술 담당 직원들을 모아놓고 으름장을 놨다. 세 번 안에 무조건 성공하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첫 번째 로켓은 발사한 지 30초 만에 폭발했다. 이듬해 두 번째 발사와 세 번째 발사도 실패했다. 회사는 파산 위기에 몰린 상황. 머스크는 기술진을 회의실로 불렀다. 다들 머스크가 욕설을 쏟아내며 계획 중단을 선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스크는 “세 번이나 배웠다”며 “다시 한번 쏘아보자”고 격려했다. 회사의 운명을 건 이 네 번째 발사가 성공하면서 스페이스X는 로켓을 지구 궤도로 쏘아 올린 세계 첫 민간 기업이 됐다. 머스크는 직원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고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직원들에게 관대한 경우가 있다. 실패했을 때다. 성공에서 얻지 못하는 중요한 가치를 배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한계가 어디인지,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예상치 못한 변수는 무엇인지 오로지 실패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최근 스페이스X의 대형 우주선인 스타십이 2차 시험 비행에 실패했다. 240㎞ 상공까지 쏘아 올린다는 목표였지만 90㎞ 상공에서 폭발했다. 그나마 위안을 얻은 것은 지난 4월의 1차 때보다 4분가량 더 비행하면서 2단 로켓의 아랫부분을 분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페이스X 사옥은 1차 실패 때처럼 ‘축제’ 분위기였다. 직원들은 우주선 폭발 광경을 보며 손뼉을 쳤고, 머스크는 자신의

    2023.11.20 18:04
  • [천자칼럼] '펜타닐'이 뭐길래

    독일의 전쟁 평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명저 은 적의 힘을 약화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적의 전투력을 훼손하거나, 적의 후방 인프라를 파괴하는 식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물리력을 행사하는 대신 ‘정신력을 고갈시켜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이 관점에서 전쟁을 본다면 미국에 역대 가장 심각한 타격을 준 나라는 중국이다. ‘사상 최악의 마약’으로 평가받는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을 통해서다. 펜타닐은 천연재료에서 추출한 헤로인 등과 달리 각종 화학 재료를 합성해 만든다. 그만큼 만들기가 쉽다. 대부분 원료는 중국에서 생산된다. 그 뒤 제3국에서 합성을 거쳐 미국으로 넘어간다. 2000년대 들어 미국 내 펜타닐 중독자는 연일 쏟아지고 있다.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사망자 수만 봐도 그렇다. 미국인이 가장 많이 사망한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이다. 독일 이탈리아 등을 상대로 한 유럽 전선에서 28만 명, 일본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에서 20만 명이 전사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합성 마약으로 사망한 사람은 30만 명을 훌쩍 웃돈다. 미국의 청장년층 사망 원인 1위가 펜타닐 중독일 정도다. 중국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총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역대 전쟁 당사국들보다 미국에 심각한 타격을 준 셈이다. 여기에 각종 사회문제까지 더해진다.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의 유서 깊은 도시들은 대낮에도 펜타닐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이른바 ‘마약 좀비’가 넘쳐난다. 도시의 핵심 기반이 붕괴하고 범죄율은 치솟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5일(현지시간) 열리는 정상회담에서 중국 내 펜타닐 원료 제조

    2023.11.15 17:48
  • [천자칼럼] '증시 불개미' vs '정치 개딸'

    “네가 대한민국 국민이냐?” “내 돈 어떡할 거야? 이 XX야.” 얼마 전 여의도 증권가에서 개인 주식 투자자들이 출근하는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둘러싸고 욕설을 퍼붓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 중년 남성은 어깨를 밀쳤고, 한 여성은 욱일기가 그려진 피켓을 들고 “매국노”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이 애널리스트는 지난 4월 대표적인 ‘2차전지’ 관련주인 에코프로에 대해 “고평가됐다”는 보고서를 낸 한 증권사 연구원이다. 보고서 발간 후 이 증권사에는 ‘애레기’(애널리스트와 쓰레기 합성어)라는 항의가 이어졌고, 계좌 해지 건수도 급증했다. 요즘 개미 투자자들의 성향은 이처럼 공격적이다. 집단 시위를 하고 협박성 문자 폭탄을 날리는가 하면 직접 찾아가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최근 시끄러운 2차전지 분야에서 개미들의 배타적 성향은 특히 더하다. ‘매수’를 외치는 전문가와 유튜버들을 ‘추앙’하지만 업황을 깎아내리면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낸다. 그 집단 린치의 수위를 따지면 인근 국회의사당 주변에 포진한 ‘개딸’들 못지않다. 정부가 최근 한시적 공매도 금지를 발표하면서 시스템 정비를 이유로 들었지만, 그 이면에도 과격한 언사로 정치권을 압박해온 극성 개미 부대가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공매도 금지 첫날인 지난 6일 2차전지 대표주들이 폭등했지만, 약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후 3~4일간 급락하며 대부분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개미들은 이제 한술 더 떠 시장조성 역할을 맡은 증권사들의 공매도까지 금지해야 한다고 우기고 있다. 시장조성자는 주식 관련 상품의 거래 부진을 막기 위해 매수·매도호가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공매도를 막

    2023.11.10 18:01
  • [천자칼럼] 기업인의 수염

    “다음 인물들의 수염 중 누가 가장 멋진가.”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이 정보기술(IT)업계 거물들의 사진을 걸고 이처럼 뜬금없는 순위를 매긴 적이 있었다. 2008년이다. 2000년대 중후반 실리콘밸리 임원들 사이에 수염 열풍은 그만큼 거셌다.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자), 래리 엘리슨(오라클 창업자), 스튜어트 버터필드(슬랙 창업자) 등 내로라하는 IT업계 거물들이 너도나도 수염을 기르던 시절이다. 수염은 ‘창의성’ ‘전문성’을 의미했고, 경영자에겐 ‘소탈함’과 ‘카리스마’의 상징이었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수염을 처음 기른 것도 2006년, 카카오를 처음 꾸릴 때였다. 김택진(엔씨소프트 창업자), 송재경(넥슨 공동창업자) 등 국내 IT업계 거물들도 이즈음 수염투성이 얼굴로 활보하고 다녔다. 한국에서 수염의 후광 효과는 의외로 강렬하다. 일반 직장에선 좀처럼 허용되지 않다 보니 수염을 기르면 일단 ‘자유로운 영혼’이거나 조직에서 ‘웬만큼 높은 사람’을 의미한다. 정치인들에겐 곧잘 쓰이는 소품이다. 대통령 선거 출마를 앞두고 고뇌할 때는 수염을 기르는 게 다반사였다. 2016년 일선에서 물러나 네팔을 둘러봤던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민생 탐방에 나섰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그런 사례다.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 손학규 전 경기지사 등도 칩거할 때는 관행처럼 덥수룩한 모습을 보였다. 수염의 효과 만큼 이를 깎는 행위가 주는 상징성도 크다. ‘쇄신’이자 ‘결단’이며 ‘부활을 위한 자기 파괴’다. 정치인이 출마 선언을 할 때나, 운동선수가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수년간 길러온 수염을 미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다. 김범수 창업자도 면도하고 17년 만

    2023.11.07 17:51
  • [천자칼럼] 노동계 '파이터'들의 변신

    “민주노총의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정권 퇴진 투쟁은 수없이 등장했는데 문재인 정부 때는 한 번도 없었다. …노란봉투법도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을 가진 거대 집권당 시절에 충분히 통과시킬 수 있던 법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인제 와서 입법을 추진한다. 민주노총이 민주당의 하청을 받아 용역 투쟁을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내용만 보면 여당의 중견 정치인이 쓴 것 같지만 실제 이 글의 작성자는 강성 노동 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던 정호회 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대변인이다. 최근 인터넷에 ‘나의 노동운동 실패기, 그리고 새로운 선택’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정 전 대변인은 2003년 화물연대를 조직해 파업을 주도한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노동 현장의 후배들에게 ‘뼈 때리는’ 질타를 하고 있다. 정 전 대변인은 과거 통합진보당 사태 때 보여준 노동계의 폭력성과 정치 편향성에 기가 질렸다고 한다. 여기에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가 노동계를 떠나는 결정타가 됐다. 우리 편이 무조건 옳다는 진영논리가 충격이었다고 했다. 민주노총 조직실장 출신인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도 최근 기득권 노조의 구태를 비난하며 탈(脫)진보를 선언한 인물이다. 그는 “양대 노총 조합원 상당수는 이미 상위 50%의 기득권층”이라며 “재벌, 정부 탓만 하지 말고 먼저 무언가를 내놓겠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했다. 과거 노동운동가 중에서 보수진영으로 돌아선 사례는 왕왕 있다. 도루코 노조위원장 출신인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서울지하철공사 노조 설립을 주도한 배일도 전 한나라당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 전 대변인과 한 사무총장은 민주노총

    2023.11.01 17:41
  • [고경봉의 논점과 관점] 이태원 참사 다큐와 음모론자들

    이태원 해밀턴호텔 옆으로 꽃다발과 촛불이 놓인 골목길을 지나쳐 갈 때면 아직도 가슴이 내려앉는다. 낮에도 컴컴해 뵈는 저 좁디좁은 길 위에서 1년 전 159명이 압사했다. 행인들이 추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도하고 흐느끼거나 또는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한다. 누군가는 사회를, 누군가는 정부를 지탄하기도 한다. 새삼 느끼지만 1년으로 치유될 상처가 아니다. 과거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세월호가 그랬듯 이 트라우마도 한참 동안 사회를 짓누를 것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재난을 정치화하는 무리들중요한 것은 참사를 직시하는 것이다. 애써 의미를 깎아내지도 말고 덧대지도 말아야 한다. 시간을 들여서라도 오로지 재난만 직시해 책임을 가리고, 재발을 막고, 피해자와 유족을 위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매번 무언가에 휘둘렸다. 재난이 터지면 야권은 정권을 단죄한다며 달려들었다. 친야 성향의 커뮤니티와 SNS에선 온갖 의혹이 무분별하게 제기됐다. 정부의 모든 행동은 ‘은폐’와 ‘조작’으로 간주되고 곧이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커졌다. 그럴 때마다 정부 부처는 그저 면피하기 급급했고 여권에선 재난의 의미를 애써 평가절하했다. 그러다 각종 조사위원회가 꾸려지고 시민단체와 노동계 인사들로 채워졌다.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K 재난처리’ 방식이다. 세월호가 그랬다. 9년간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진상 조사를 벌였지만 제대로 건진 게 없었고 사회적 갈등만 더 키웠다. 이제 이태원 참사도 그럴 조짐이다. 과거 대형 참사 때마다 정치 프레임을 씌워온 자들과 음모론자들을 제대로 막지 못한 원죄다. 최근 미

    2023.10.25 18:08
  • [천자칼럼] 김범수의 시련

    23일 서울 여의도동 금융감독원 정문에 포토라인이 설치됐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카카오의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혐의와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한 것이다. 2019년 금감원이 특별사법경찰(특사경)을 출범시킨 후 포토라인에 누군가를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내 정보통신기술(ICT)의 상징적 인물을 범죄 피의자로 소환하는 ‘그림’이 나오니 언론의 관심도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시장 범죄자를 잡겠다며 만든 조직의 ‘1호’ 포토라인 주인공이 된 당사자는 굴욕일 수밖에 없다. 김 창업자의 위상은 벤처 1세대 중에서도 특별하다. 그는 1998년 인터넷 게임 포털인 한게임을 설립한 뒤 NHN(현 네이버)과 합병시켰다. 2008년엔 벤처기업 아이위랩을 인수한 뒤 ‘카카오톡’을 출시했다. 국내 양대 빅테크인 네이버와 카카오를 세우고 성장시킨 주역인 것이다. 카카오 그룹의 성장 속도는 그야말로 눈부셨다. 2014년 ‘다음’ 인수를 시작으로 거침없이 계열사를 늘렸다. 2018년 65개였던 계열사는 올해 기준 144개로 급증했고, 같은 기간 자산 기준 재계 순위가 30위권 밖에서 15위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그 성장 속도만큼 후유증도 컸다. 툭하면 불거지는 임직원 리스크가 대표적이다. 특히 류영준 전 카카오페이 대표 등이 2021년 상장 직후 수백억원어치 주식을 현금화하며 ‘먹튀’ 논란을 일으켜 공분을 샀다. 김 창업자의 개인적 수난도 이어졌다. 2016년 대기업집단 지정 과정에서 계열사 5곳의 신고를 누락한 혐의로 기소돼 5년간 재판을 받았다. 툭하면 국정감사에 불려 나와 의원들의 호통을 듣기도 했다. 김 창업자는 이제 역대급 위기에 직면했다. 최악의 경우 본인이 처벌받는 것은 물

    2023.10.23 17:56
  • [천자칼럼] '초롱이' 사라질까

    우리나라에 자동차 시대가 열린 것은 1970년 즈음이다. 신진자동차 현대 아세아 등 자동차 회사가 잇따라 설립됐고 국내 차량 대수는 10만 대를 넘어섰다. 중고차 판매도 이즈음부터 붐을 이뤘다. 서울 무교동 일대에 불법 브로커들이 성업했고 양화대교 북단에는 국내 최초의 중고차거래소가 문을 열었다. 중고차는 도시 서민들에게 온 가족의 ‘생명줄’이었다. 아버지는 수년간 공사판을 전전하며 모은 40만원으로 현대 코티나 중고 택시를 구매해 밤낮으로 몰았다. 삼촌은 암시장에 나온 1950년식 미군용 트럭을 싸게 얻어 막 뚫린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화물을 실어 날랐다. 중고차 보급이 늘면서 전국 일일권 시대가 열리고 다양한 서비스업도 생겨났다. 하지만 중고차 시장은 태생적으로 정보 비대칭 문제를 안고 있었다. 시민들이 무허가 판매업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사고 차량이나 침수 차량을 떠안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1970년대 초에는 불량 중고차 사고가 하도 잦아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중고차 매매를 중지하거나 공무원 경력자에게만 판매 자격을 주는 황당한 시절도 있었다. 1980년대 중고차 매매시장이 제법 커지자 그 주변은 조직폭력배들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기업형 조폭으로 악명 높았던 장안파가 대표적이다. 2000년대 들어 온라인 판매망이 구축되고 정부의 관리 감독이 강화되면서 중고차 시장에 대한 신뢰가 커졌지만 지금도 잊을 만하면 허위 매물, 강매 등의 범죄 사례가 나온다. 지난 5월 개봉한 영화 ‘범죄도시3’에서 침수차를 강매하는 조폭 ‘초롱이’는 코믹한 연기로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 매매 현장에서는 사라져야 할 캐릭터다. 현대자

    2023.10.19 17:54
  • [천자칼럼] 위고비 '나비효과'

    2000년대 초중반 ‘전자제품 메카’였던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디지털카메라와 MP3 플레이어였다. 만만찮은 가격임에도 중장년층은 물론 청소년까지 용돈을 모아 구매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2007년 이후로 이들 제품은 매대에서 밀려났다. 아이폰을 시작으로 스마트폰이 대거 등장하면서다. 스마트폰의 ‘학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피처폰과 내비게이션 기기, 전자사전이 멸종하다시피 했고 온라인 메신저와 게임기도 자취를 감췄다. 심지어 용산 전자상가를 비롯한 오프라인 매장의 업황마저 기울기 시작했다. 단일 제품이 이처럼 특정 영역의 제품을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여러 품목의 제품군을 동시에 밀어내는 현상은 산업계에서 이따금 나타난다. 이달 들어 뉴욕증시에서 식음료·유통 관련 종목들이 동반 급락하고 있다. 코카콜라와 펩시코가 52주 신저가 수준으로 밀려났고 제과·식품·주류 업종 대표주도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월마트 등 유통 업체와 건강관리 업체까지 하락세를 보였다. 유통·식음료 분야 전체를 위협하는 ‘생태계 교란종’이 출현했다는 공포가 투자자들을 덮친 것이다. 위고비, 오젬픽 등 식욕억제제가 그 장본인이다. 덴마크 제약사 노보노디스크가 개발한 위고비는 월간 투여 비용이 200만원에 육박하지만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모델 킴 카다시안 등의 다이어트 비결로 입소문이 나면서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다. 존 퍼너 월마트 미국부문 CEO는 블룸버그통신에서 “식욕억제제를 복용한 사람들이 식료품 쇼핑을 줄이고 있다”며 위협 요인으로 등장했음을 인정했다. 모건스탠리도 앞서 지난 8월 보고서를 통해 “복용자들

    2023.10.06 17:52
  • [데스크 칼럼] 번지수 잘못 짚은 스타트업 정책

    얼마 전 발표된 내년 정부 예산안을 항목별로 보면 ‘산업·중기’ 분야가 가장 눈에 띈다. 7개 주요 항목 중 예산 삭감 폭이 가장 크다. 전년 대비 무려 18%가 줄었다. 전례를 찾기 힘든 수준이다.산업·중기 예산이 쪼그라든 가장 큰 이유는 소상공인 손실보상 등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한시적 지원이 종료된 영향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삭감 폭을 설명하기 힘들다. 창업·벤처 분야는 물론 ‘소재·부품·장비’ 등 산업 혁신 분야, 특허 지원 등 지식재산 분야까지 줄줄이 깎였다. 대표적인 게 벤처캐피털(VC) 운용사들이 펀드를 만들어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종잣돈 역할을 하는 모태펀드 예산이다. 내년 예산이 3135억원 규모로, 올해보다 39.7% 감소했다. 정부가 ‘건전재정 기조’를 확립하겠다며 가장 만만한 중소기업, 스타트업 육성 예산을 후려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민간 주도로? 허용은 했나정부가 들이댄 논리는 “이제 정부는 할 만큼 했고 민간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련 부처 장관은 “언제까지 정부가 견인해야 하느냐”고 했다. 사실 정부 논리는 틀린 게 아니다. 정책적 목적을 가진 정부 자금 비중이 지나치게 높으면 스타트업 육성 기능이 왜곡된다. 미국처럼 액셀러레이터와 같은 민간 전문기관이 창업자들을 키우고, 민간 투자사들이 자금을 대거나 경영권을 인수하는 선순환이 바람직하다.하지만 ‘미국처럼 민간이 하라’고 하기에 앞서 ‘미국처럼 민간에 허용해줬나’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민간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개인과 기업 자금이 투

    2022.09.18 18:01
  • [데스크 칼럼] 편견·외압과 싸웠던 ICT 개척자들

    1982년 봄 여름 대한민국의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은 곳곳에서 태동했다. 무엇보다 인터넷이 처음 연결됐다. 그해 5월 서울대 연구실 PC에서 입력된 ‘SNU’라는 문자가 250㎞ 떨어진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의 PC 모니터에 떴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개가였다.경기 부천에선 삼성 반도체연구소가 막 문을 열었다. 삼성이 반도체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이다. 이윤우(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임성(전 삼성반도체 미주법인장) 김기남(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 등 삼성 반도체 1세대가 모여 이듬해 탄생할 64K D램 개발에 착수했다. 척박한 땅에서 시작된 도전통신도 혁신 원년에 돌입했다. 일반 국민에게는 생경한 ‘데이터 통신’ 회사(데이콤)가 처음 설립되고, 전자식교환기(TDX) 개발이 본격 시작됐다. 1996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을 거쳐 2019년 세계 최초 5G로 이어지는 거대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지금이야 IT 강국이어서 웬만한 ‘세계 1위’ 타이틀에도 감흥이 없지만, 당시엔 막 후진국 티를 벗은 국가였다. 하나하나가 파격이었다.I(정보)·C(통신)·T(기술)의 씨앗이 40년 전 한꺼번에 움튼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이다. 인터넷 혁명은 전길남 KAIST 명예교수 등 학자와 연구자들이 주도했다. 반도체 진출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등 기업인들이, 통신 분야 혁신은 오명 한국뉴욕주립대 명예총장· 양승택 전 정보통신부 장관 등 당시 정부 관료와 공공기관장들이 이끌었다. 각각 다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담대한 도전이 화학 반응하며 한국 ICT 산업을 일으켰다.하지만 개척자들이 당시 직면한 현실은 험난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근무하던 전 교수가 1979년 귀국

    2022.07.27 17:26
  • [데스크 칼럼] 낡은 규제로 에어택시도 세울 건가

    요즘 매일 늦은 밤이 되면 도심 곳곳에서 ‘승차 대란’이 벌어진다. 택시 잡느라 한두 시간을 길에서 허비하든가, 고액 요금을 각오하고 고급 택시를 호출해야 한다. ‘월천’(한 달에 1000만원 이상 소득) 기사도 제법 생겨났다. 택시업계가 오랜만에 특수를 만났다.반면 배달시장에선 살풍경이 이어진다. 배달 근로자들은 일감이 끊기고 계약이 해지된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배달 ‘라이더’들이 떠나면서 중고 시장엔 배달용으로 쓰였던 오토바이가 넘쳐난다.지난해까지만 해도 택시업계와 배달업계의 상황은 지금과 정반대였다. 호황을 맞은 배달·택배시장은 ‘구인 대란’이 한창이었다. e커머스 회사들은 배달 기사를 확보하기 위해 배달 수수료를 올렸다. 라이더들의 ‘월천’ 인증 사례가 이어졌다. 하지만 택시 회사들은 수익성 악화로 벼랑 끝에 몰렸다. 면허 가격은 급락했고 택시 기사들은 배달 기사로 전업했다. 대란에도 꿈쩍 않는 규제이 대목에서 문득 궁금해진다. 이럴 거면 택시엔 배달을 허용하고, 일반 차량엔 손님을 받을 수 있게 하면 안 되나? 이참에 요금 자율성도 높여 운수 산업 종사자들이 업황 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하고, 이용자들은 과도한 택시비나 배달비 부담을 덜게 하면 안 될까. 디지털 세상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운수 대란에도 국내 칸막이 규제가 꿈쩍하지 않는 것을 어찌 봐야 하나.한국 운수 산업의 규제 강도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원칙적으로 승객은 택시 면허가 있어야만 태울 수 있다. 그런데 사람 없이 물건만 태워 보내면 그것은 불법이다. 일반 승용차로는 물건 배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남의 차를 빌려서 배달

    2022.06.08 17:37
  • [데스크 칼럼] 반도체 '초격차'만으론 부족하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와 인텔의 시가총액을 합친 것보다 큰 반도체 회사가 등장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당시 엔비디아의 위상은 미약했다.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그래픽처리장치(GPU)는 픽셀의 색을 구현하기 위해 연산 작업을 하는 칩으로, 중앙처리장치(CPU)의 보조 장치 정도로 인식됐다. 반도체 산업은 CPU의 강자인 인텔이 지배하고 있었다.변화의 시작은 엔비디아가 한 대학원생의 연구에 주목하면서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이안 벅(현 엔비디아 부사장)은 GPU의 병렬컴퓨팅 기능을 활용해 컴퓨터의 연산 성능을 높이는 이른바 ‘가속 컴퓨팅’을 연구하고 있었다. 엔비디아는 그의 연구를 지원했고, 벅은 이를 통해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인 ‘쿠다(CUDA)’를 개발했다. 엔비디아를 바꾼 대학원생들쿠다는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정보기술(IT) 기업들은 “그래픽카드를 활용해 대규모 연산을 할 만한 거리가 뭐가 있느냐”고 반응했다. 그런데도 엔비디아는 “언젠간 미래를 바꿀 플랫폼이 될 것”이라며 매년 수십억~수백억원을 유지 관리에 쏟아부었다.진흙 속에 묻혀 있던 쿠다가 발견된 것은 개발 후 6년이 지나서였다. 2012년 캐나다 토론토대 대학원생인 알렉스 크리제프스키는 인공지능(AI)이 이미지를 얼마나 잘 식별하는지를 겨루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그는 쿠다를 이용해 연산 속도를 끌어올리는 방법을 고안했다. “장비에 집착하지 마라”는 교수의 꾸지람에도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천착했다. 엔비디아 GPU에 쿠다를 적용해 1주일간 컴퓨터를 학습시켰다.그 결과는 AI의 역사를 바꿨다. 이전까지

    2022.04.17 17:16
  • [데스크 칼럼] 스톡옵션·물적분할 논란의 이면

    ‘유독 한국 기업만 저지르는 나쁜 짓’이 있어서 ‘한국에만 있는 규제’를 신설한다고 한다. 요즘 자본시장에서 ‘뜨거운 감자’가 된 주식매수청구권(스톡옵션)과 물적분할 얘기다.스톡옵션 논란은 카카오페이 경영진이 촉발했다. 상장 한 달 만인 지난해 11월 임원 8명이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을 팔아 878억원의 차익을 챙겼다. 유망 상품이라며 개인에게 청약을 받아놓고 경영진이 대규모 매도에 나선 것이다. 국내외에서 사례를 찾기 힘든 상식 밖 행동이었다.물적분할 논란은 그동안 간간이 있었지만 개미들의 분노가 본격화된 것은 LG화학에서 분사한 LG에너지솔루션이 지난 1월 상장하면서다. 상장은 크게 성공했지만 LG화학 주가는 상장 후 연일 급락했다. 이 역시 주요 선진국에서는 벌어지지 않는 논란이다. 해외 기업들은 유망 사업부를 떼어내 외부 자금을 유치할 때 물적분할 대신 모회사 주주들이 지분을 나눠 갖는 인적분할을 선호한다. 또다시 등장한 'K규제'안 그래도 대선을 앞둔 시기에 개미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으니 정부와 정치권이 그냥 넘어갈 리 없다. 금융당국은 발 빠르게 스톡옵션 규제 마련에 착수했다. 경영진의 스톡옵션 행사 물량에 대해 일정 기간 보호예수를 걸기로 했다.‘소액주주 보호’라는 명분 때문일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과잉 규제가 들어갔다. 금융당국은 스톡옵션 논란과 무관한 주식 보호예수 규제 방안을 슬쩍 포함시켰다. 스톡옵션 규제에 굳이 정부가 나서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상장 추진 기업과 자문 증권사가 협의해 스톡옵션 행사 물량에도 보호예수 기간을 두도록 계도하면 될 일이다.물적분할 규제 움직임은 더욱 우

    2022.03.07 17:16
  • [데스크 칼럼] 기업·K콘텐츠의 역대급 콜라보

    영화 ‘라라랜드’로 유명한 미국 영화 제작사 엔데버콘텐츠가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오자 CJ ENM은 인수협상단을 꾸려 할리우드로 날아갔다. 매각사 측을 만나 자기소개를 하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우리가 영화 ‘기생충’을 만든 회사입니다.”과거를 돌아보면 한국 기업들의 해외 진출은 매번 자신을 알리는 단계부터 고역이었다. 산업화 초기인 1970년대는 특히 그랬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조선소를 세우려고 외국 은행을 돌았지만 회사는 내세울 게 없었고, “봐라,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배를 잘 만들었다”며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들이밀던 시절이었다. "기생충 만든 회사" 한마디에…20~30년 전까지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현대·삼성·LG·대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국내 대기업은 글로벌 M&A·투자 시장에서 무명에 가까웠다. 2000년대 들어 국내 기업과 투자사들의 글로벌 진출이 가속화됐지만 해외 합작이나 투자가 쉽지 않았다.그때 국내 기업들을 해외에 알리는 데 쏠쏠한 역할을 한 것이 프로스포츠 중 처음으로 한국이 전 세계를 호령한 골프였다. 2011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타이틀리스트로 유명한 골프용품 업체 아쿠쉬네트를 인수할 때 얘기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미래에셋’이란 회사명에 아쿠쉬네트 임직원과 주주들은 미심쩍어했다. 미래에셋은 당시 아시아 선수 최초로여자 세계랭킹 1위를 달리던 신지애의 사진을 내밀었다. 모자엔 미래에셋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게다가 파트너는 골프웨어 분야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던 글로벌 4위 스포츠 브랜드 휠라

    2022.01.05 17:45
  • [데스크 칼럼] 유니콘 고공 행진을 보는 다른 시선

    한 대형 증권사 사장이 최근 임직원과 대화하다가 “주가를 끌어올릴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있다”며 눈을 반짝였다. “일단 적자 전환을 하는 거야. 그리고 플랫폼이나 핀테크를 사업 목적에 추가하는 거지. 어때?” 물론 농담이다. 사상 최대 실적을 구가하면서도 주가가 옆으로 기는 증권사들과 적자임에도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혁신기업들을 비교하면서 부러움과 답답함에 나온 넋두리였을 것이다.우리는 자본시장의 전례없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카카오페이가 그렇다. 지난달 상장한 이 새내기 핀테크 회사의 시가총액은 19개 상장 증권사의 몸값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이들 증권사의 올해 영업이익 총액은 사상 처음 10조원을 돌파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설립 후 한 번도 흑자를 내본 적 없는 5년차 핀테크 업체가 ‘올킬’해버렸다. 증권사 19곳보다 비싼 '카페'지난 3월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된 쿠팡의 시총이 100조원을 넘겼을 때만 해도 상당수 투자자는 ‘이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7월 카카오뱅크가 등장해 KB금융지주와 신한금융지주를 합친 몸값을 추월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했다. 최근 카카오페이의 약진을 보면서는 이제 ‘당연하다’는 듯 인식한다.이 인식은 투자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요즘 플랫폼·e커머스·핀테크·가상화폐 등 이른바 혁신 분야 장외 기업들의 몸값은 자고 일어나면 치솟는다. 마켓컬리는 작년 중순 9000억원이던 몸값이 올해 중순엔 2조5000억원, 최근엔 4조원이 됐다. 2018년 400억원이던 버킷플레이스(오늘의집)는 올초 몸값이 1조원을 넘었고 최근엔 2조원대로 거론된다. 3

    2021.12.08 17:09
  • [데스크 칼럼] 비겁한 연금 개혁 회피

    수술을 해야 한다. 정부도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떻게 손을 대더라도 욕먹을 게 뻔하다. 좌고우면하던 정부는 결국 국회에 결정하라며 ‘퉁’ 쳤다.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국회를 설득해도 모자랄 판인데 될 리 없다. 바로 연금개혁 얘기다.문재인 정부는 연금개혁을 외면한 유일한 정부로 남게 될 전망이다. 이번 정기국회가 사실상 개혁안을 다룰 마지막 기회다. 하지만 이미 여의도는 내년 대통령 선거에 온 신경이 가 있다. 여론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게 뻔한 ‘폭탄’에 손을 댈 리가 없다. 정부의 의도적인 책임 방기다. 연금 재정의 악화 속도는 더 빨라지고 청년들이 떠안아야 할 부담은 더 커지게 됐다. 연금개혁 외면한 유일 정부1988년 국민연금이 도입된 뒤 모든 정권은 좌우를 막론하고 공적연금에 칼을 댔다.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의 보험료를 올리거나 연금 지급률을 낮추거나 또는 지급 연령대를 높이는 방안을 밀어붙였다. 그때마다 노동계 등 이해단체의 반발은 강력했다. 하지만 연금 제도가 지속되려면 불가피했다. 초기 5.5%의 공무원연금 보험료율이 지금 18%대로, 3%인 국민연금 보험료율이 지금 9%로 오른 것은 이전 정부들이 십시일반 짐을 나눠 진 결과다.이번 정부는 그 부담을 지기를 거부했다. 정부 초기부터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2018년 8월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의 개편 초안에 여론이 반발하자 청와대는 “정부안이 아니다”고 발을 뺐다. 문재인 대통령은 “나도 (개편안에) 납득할 수 없다”며 거들었다. 그해 11월 보건복지부가 정부안을 내놨을 때도 청와대는 왜 이런 걸 꺼내느냐는 듯 불편한 심기가 가득했다. “국민 눈높

    2021.10.27 17:21
  • [데스크 칼럼] 벤처투자를 죄로 보는 시선

    코로나19 확산 이후 미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기업과 가장 추락한 기업을 한 곳씩 꼽자면? 줌(ZOOM)과 유나이티드항공이 유력 후보가 될 듯하다. 줌은 코로나 수혜주로 부각되면서 지난해 4분기 실적이 전년 동기 대비 네 배 급증했다. 반면 유나이티드항공은 코로나 충격으로 지난해 8조원의 영업손실을 냈다.코로나에 서로 극명하게 엇갈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들 기업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올해 초 나란히 벤처캐피털(VC)을 설립한 것이다. 역대급 호황을 맞은 기업도, 전례 없는 위기를 겪은 기업도 ‘포스트 코로나’의 해답을 스타트업 투자에서 구하기로 했다. 글로벌 IT공룡 벤처 투자 열풍최근 글로벌 투자업계에서 기업계열 벤처캐피털(CVC)의 존재감은 유난히 두드러진다. 아마존 알렉사펀드는 지난해 전기차 스타트업 리비안에 2조원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중국 텐센트는 지난달 인공지능(AI) 신약 개발 회사 엑스탈피에 투자해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일본 소프트뱅크 산하의 비전펀드는 막대한 자금력으로 전 세계 테크 기업을 쓸어담고 있다.구글(구글벤처스), 인텔(인텔캐피털), 바이두(바이두벤처스), 상하이자동차(사익캐피털) 등 글로벌 공룡들은 CVC를 앞세워 전 세계에 연간 30~50건씩 투자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이를 통해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스타트업들은 투자 유치와 동반성장의 기회를 얻게 된다.올해 상반기 전체 미국 VC 투자 건수는 반기 기준 역대 최다인 7058건에 달했는데, 이 중 44%가량이 CVC 등이 투자한 건이다. CVC 투자는 2~3년 전만 해도 전체 벤처투자의 4분의 1 남짓이었지만, 어느새 전통 VC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

    2021.09.01 17:37
  • [데스크 칼럼] "사장 자리요? 현금으로 주세요"

    “현금으로 수백억원 받을래? 아니면 수십억원 덜 받는 대신 포장재(또는 세탁 서비스) 기업 주식과 사장 자리 받을래?”기업 창업자의 자녀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지면 어떤 답이 돌아올까. 당연히 ‘사장’ 타이틀을 원할 듯하지만 요즘 인수합병(M&A) 시장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최근 한 달 남짓 사이에 쉰 살 넘게 먹은 대표 장수기업 두 곳이 사모펀드(PEF)에 팔렸다. 하나는 51년 된 국내 가구 1위 한샘이다. 이 회사는 총수 일가가 경영을 계속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창업자인 조창걸 명예회장은 80세를 넘겼지만 슬하의 3녀는 물론 사위들도 경영에 뜻이 없었다. 50년 넘은 기업 잇따라 매각이보다 한 달쯤 앞서 57년 된 남양유업도 PEF에 매각됐다. 이 회사는 지난 몇 년간 ‘갑질’과 소비자 기만 등으로 ‘오명’을 켜켜이 쌓아왔다. 표면상으로는 회사가 벼랑 끝 위기에 몰리자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 총수 일가가 두 손을 든 모양새다. 하지만 속내는 조금 다르다. 이 회사는 2~3년 전부터 매각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 홍원식 전 회장이 20년 가까이 50% 넘는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상무와 본부장을 맡은 아들들의 지분율은 줄곧 0%였다. 회사를 둘러싼 논란과 상관없이 일찌감치 기업 승계를 포기한 것이다.이들 기업 말고도 올해 장수기업들의 매각 사례가 유난히 많다. 29년 된 국내 세탁업계 1위 크린토피아도 총수 일가가 지분 100%를 내놨다. 속옷 제조업체 BYC의 총수 일가가 보유한 승명실업 역시 팔렸다. 이 회사는 BYC에 들어가는 포장재를 제조한다. 마찬가지로 매각 원인은 기업 승계에 차질을 빚어서다. 요즘 이런 장수기업 M&A 시장은 말 그대로 불

    2021.07.18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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