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모습. 사진=뉴스1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모습. 사진=뉴스1
"이태원 현수막 사건 직후에 아들이 학원에서 '너희 아파트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었다더라구요. 아파트 전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그러고 다니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은마아파트 주민 정모씨)

"운동 모임에서 '그 단지는 무슨 일이 그렇게 많냐'는 말이 나왔습니다.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겨우 참았습니다."(은마아파트 주민 백모씨)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에 자리잡아 '흥행 보증수표 재건축'으로 불렸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먹구름이 꼈다. 일부 주민들로 구성된 재건축추진위원회(추진위)가 이태원 참사를 빗댄 현수막을 내걸거나 주택가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의 행동을 벌이고 있어서다. 주민들은 과도한 행보에 재건축 사업도 차질을 빚을까 우려하고 있다.

재건축 청신호도 잠시…반복되는 추진위發 논란

은마아파트는 지난 10월19일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의 재건축 심의를 통과했다. 재건축 추진위원회가 꾸려진 2002년 이후 20년 만이다. 앞으로 조합설립인가 → 사업시행인가 → 관리처분계획인가 → 이주·철거 →착공·분양까지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은마아파트는 1979년 준공·입주해 현재 28개동 4424가구로 구성되어 있다. 재건축을 통해 33개동 5778가구(공공주택 678가구)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현재 용적률(대지면적 대비 건축물 연면적 비율)은 204%다.

재건축 심의 통과로 청신호가 켜진듯 했던 은마아파트의 발목을 잡은 건 일부 주민들이다. 추진위는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C노선 공사와 열차 운행 등이 노후한 은마아파트에 안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며 우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논란도 거듭 빚어졌다.
은마아파트 지하를 관통하는 GTX C노선도 원안. 사진=국토교통부
은마아파트 지하를 관통하는 GTX C노선도 원안. 사진=국토교통부
추진위는 지난 6월 주거 지역 통과 최소화라는 원칙을 지키라며 집회를 열었다. 추진위의 요구에 국토부 권고까지 더해지자 현대건설은 지난 9월 매봉산을 통과하는 우회 안을 제출했다.

우회 안에는 은마아파트를 대신해 도곡동 강남세브란스병원, '도곡삼익', '도곡래미안카운티', '도곡렉슬', '역삼래미안' 등을 관통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 우회 안은 논란 끝에 무산돼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은마아파트가 지역 사회의 눈총을 받는 계기가 됐다.

추진위는 지난달 아파트 외벽에 '이태원 참사 사고 은마에서 또 터진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걸어 다시 논란을 샀다. 입주민들 사이에서도 '선을 넘었다'는 항의가 쏟아지면서 현수막은 이내 철거됐다.

지난달 12일부터는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에서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GTX C노선 시공사(우선협상대상자)가 현대건설이니 기업 총수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주거지에서 항의한다는 취지다. 추진위 관계자 300여명이 일반 주거지에 피켓과 확성기를 동원해 시위하다 항의를 받자, 최근에는 차량을 동원해 시위에 나섰다.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 골목이 서행하는 시위 차량들로 정체를 빚고 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 골목이 서행하는 시위 차량들로 정체를 빚고 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GTX 관통 반대' 현수막을 붙인 차량 10여대가 한남동 주택가를 서행하는 방식으로 시위하고 있다. 이런 시위는 매일 반복되고 있다. 차량에 우퍼를 설치하고 'GTX 은마 관통 결사 반대' 등 이전 집회에서의 소리를 녹음해 반복 재생하고 있다. 한남동 주민들의 원성은 여전한 상태다. 좁은 골목길에서 차량 간격을 넓게 벌려 서행하다보니 출근길에 불편을 겪고 있다.

거듭된 논란에 은마아파트 주민들은 난처한 상황이다. 아파트 지하로 GTX가 관통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그 방법이 과하다는 지적이다. 주민 이모씨는 "국토교통부나 현대건설과 대화하면 좋겠다"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이태원 현수막이나 주택가 시위는 당혹스럽다"고 털어놨다. 주민 김모씨도 "GTX가 왜 꼭 은마 지하를 관통해야 하는지 의문"이라면서도 "다른 시민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항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35층 재건축, 49층으로 바꿔야 하는데"…높아진 우려

지역 민심이 돌아서면서 은마아파트 주민들은 최고 층수 상향은 물론 재건축 사업 자체에도 차질을 빚을까 걱정하고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 통과된 은마아파트 재건축 계획안은 최고 층수가 35층이다. 주민들은 재건축 조합을 설립한 뒤 최고 층수를 49층으로 상향한다는 계획이었지만, 민심을 등지고도 서울시의 협조를 얻을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입주민 김모씨는 "지금 은마아파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재건축"이라며 "49층으로 재건축하려면 서울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쉽게 되겠느냐"고 우려했다. 다른 입주민 이모씨도 "부동산 커뮤니티에 우리 아파트를 검색하면 재건축 승인 취소하라는 비판만 가득하다"며 "후속 행정절차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털어놨다.

실제 지역 주민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우회 안에서 관통 아파트로 지목됐던 도곡렉슬에 거주하는 구모씨는 "본인들 아파트는 안 된다면서 다른 아파트는 괜찮다는 생각이 너무 이기적"이라며 "양재천 우회 안도 저층 주거지역을 여럿 지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치동 주민 김모씨도 "다른 단지로의 우회 안이나 이태원 현수막 등을 두고 학원에서 아이들이 편을 갈라 따지듯이 대화를 하더라"라며 "어른들의 문제로 지역 전체가 편이 갈리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고 말했다.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에 설치된 GTX 관통 반대 현수막이 고정되어 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에 설치된 GTX 관통 반대 현수막이 고정되어 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한편 국토부는 오는 16일까지 은마아파트 추진위와 입주자대표회의 등을 대상으로 행정조사를 벌인다. 지난해까지 100억원 이상을 유지하던 은마아파트 장기수선충당금이 지난 10월 56억원으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국토부는 장기수선충당금이 GTX 반대 집회 등에 사용됐을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 또한 행정조사를 통해 장기수선충당금을 법정 용도 목적 외에 사용한 사실이 확인되면 업무상 횡령·배임 등으로 엄벌에 처한다는 방침이다.

오세성/김세린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