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밀레니엄힐튼서울호텔 40년 만에 '역사속으로'
서울 남산 기슭에 40년 가까이 자리잡고 있던 밀레니엄힐튼서울호텔(사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국내 부동산펀드 운용사가 약 1조원에 인수한 뒤 헐고 이 자리에 오피스 빌딩을 건립할 예정이다.

24일 부동산 및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힐튼서울 최대 주주인 CDL호텔코리아는 이지스자산운용에 이 호텔을 매각하기로 하고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다. 매각 이유는 수익성 악화 때문이다. 힐튼서울은 코로나19 여파로 중국·일본 관광객이 끊기고 예식 등 다른 부대사업도 위축되면서 고전해왔다.

힐튼서울은 1983년 12월 서울 중심가에 22개 층, 700여 개 객실 규모로 문을 연 5성급 호텔이다. 원래 주인은 대우그룹이었다. 대우개발이 운영하다가 외환위기 여파로 1999년 말 싱가포르 부동산 투자전문회사 훙릉의 자회사인 CDL에 2600억원에 매각됐다. 2004년 CDL의 호텔운영업체인 밀레니엄과 새로 계약을 맺으면서 밀레니엄힐튼호텔로 재출범했다.

힐튼서울은 시내 중심가 특급호텔이면서 산 중턱에 있다는 특성 때문에 외부 시선이 부담스러운 정치인과 기업인의 단골 모임 장소로 통했다. 지난 40여 년간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굵직한 협상의 주무대였다.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힐튼서울에서 지명됐고, 10년 뒤인 1997년에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김종필 자민련 후보 간 ‘DJP연합’도 이곳의 비밀 협상으로 탄생했다. 그해 말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 협상을 진행하고 최종 서명한 곳도 힐튼서울이었다.

구제금융 합의·DJP연합 등 굵직한 협상 주무대

힐튼서울은 대우그룹의 영욕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꼭대기인 23~24층에 있는 복층 구조의 펜트하우스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세계경영’을 진두지휘한 공간으로 유명하다. 개관 당시부터 김 전 회장 전용 집무실로 설계돼 20여 년간 대우그룹의 흥망을 함께했다. 이 집무실은 CDL로 주인이 바뀐 뒤에도 김 전 회장이 계속 사용했다. 김 전 회장과 대우개발이 장기 임대차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김 전 회장 별세 후인 지난해에야 호텔 측에서 관리하게 됐다. 현재는 기업연회, 스몰웨딩 등 행사용으로 활용된다.

이지스운용은 힐튼서울 인수를 마무리하는 대로 용도변경을 통해 오피스빌딩 등으로 재탄생시킬 계획이다. 이지스운용은 프로젝트 펀드를 조성해 인수 자금을 마련할 예정이다. 펀드에는 싱가포르 국부펀드 GIC 등을 비롯한 해외 기관투자자(LP)들이 참여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힐튼서울이 폐업하면서 서울 시내 특급호텔들의 ‘코로나 잔혹사’도 이어지게 됐다. 지난 2월 강남권 최초의 특급호텔로 이름을 알린 서초구 반포동의 쉐라톤팔레스호텔이 약 40년 만에 문을 닫고 주거용 시설로 변신을 준비 중이다. 강남구 역삼동의 르메르디앙호텔(옛 리츠칼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크라운호텔 등도 헐리고 오피스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강남 논현동에 있는 DL그룹의 글래드호텔도 매물로 나왔다. 용도 변경을 염두에 둔 부동산 개발회사(디벨로퍼)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대 앞 머큐어앰배서더호텔도 현대자산운용과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종로 아벤트리호텔은 최근 삼정KPMG가 매각 주관사로 정해졌다. 청담 프리마호텔과 논현 포레힐호텔, 명동 티마크그랜드호텔 등도 매각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부동산 개발회사들이 호텔 부지에 관심을 두는 가장 큰 이유는 입지다. 호텔 특성상 교통이 편리하고, 주로 시내 중심에 지어진 만큼 접근성이 좋다. 다만 호텔 운영으로는 수익성이 높지 않다 보니 고급 오피스텔이나 오피스빌딩으로 용도를 전환해 개발하려 하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서울 시내에서 주거시설을 지을 땅을 찾기가 어렵다 보니 호텔 매입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해외에서도 ‘노른자위’ 지역의 오래된 고급 호텔을 인수해 용도변경하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다”고 전했다.

김채연/윤아영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