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단계 재건축 단지들이 ‘2년 실거주 요건’을 피하기 위해 신탁방식 재건축을 검토하고 나섰다. 조합설립을 준비 중인 서울 압구정 한양2차.  /한경DB
초기 단계 재건축 단지들이 ‘2년 실거주 요건’을 피하기 위해 신탁방식 재건축을 검토하고 나섰다. 조합설립을 준비 중인 서울 압구정 한양2차. /한경DB
정부가 연내 조합설립 신청을 하지 못한 초기 재건축 단지 소유자에게 ‘2년 실거주’를 의무화하기로 하면서 신탁방식 재건축이 주목받고 있다. 조합설립 총회 등 각종 절차를 생략하고 3~4개월 만에 ‘사업자 신청’(조합설립 간주)을 할 수 있어서다. 전문가인 신탁사가 시행자가 되는 신탁재건축은 사업 속도가 빠르고 투명한 게 장점이다. 그동안 활성화되지 못한 신탁방식이 초기 재건축 단지 중심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조합·신탁 투트랙

20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 압구정 5구역 재건축 추진위원회는 조합설립과 신탁방식을 병행 추진하기 위해 토지 등 소유자를 대상으로 찬반 설문을 하고 있다. 연내 조합설립을 하지 못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에서다.

"2년 거주 요건 피하자" 신탁 재건축 급부상
한양 1·2차로 구성된 압구정 5구역은 전체 소유자(1232가구)의 절반가량이 외부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지난 ‘6·17 부동산 대책’에서 연말까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을 개정해 2년 실거주 요건을 신설하기로 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추진위 관계자는 “행정 리스크뿐 아니라 비상대책위원회 등 여러 가지 변수가 있다”며 “신탁방식은 시행자를 지정하면 바로 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2년 실거주 요건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압구정 5구역은 지난 5일 강남구청에 주민 탄원서와 추정분담금을 산출한 자료를 제출하고 신속한 행정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2016년 3월 도입된 신탁방식 재건축은 추진위 및 조합설립 과정을 건너뛰어 사업 기간을 1~2년가량 단축할 수 있다. 사업에 필요한 자금은 신탁사가 조달한다. 전체 소유자 4분의 3의 동의와 토지면적 3분의 1 동의 요건을 충족하면 된다. 압구정 5구역에 신탁방식을 제안한 무궁화 신탁 측은 “조합설립은 복잡한 법적 절차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6개월 이상이 소요된다”며 “신탁방식은 추정분담금 심의절차와 조합 창립총회 절차가 생략되기 때문에 오는 11월까지 사업시행자 지정 신청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신탁방식을 택한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40여 일 만에 동의서 85%, 여의도 광장아파트는 23일 만에 동의서 80%를 징구해 사업자 신청을 마쳤다.

“거주요건 생기면 가치 2억원 하락”

부동산114에 따르면 1분기 기준 수도권 투기과열지구에서 조합설립 이전 단계인 재건축 단지는 총 85곳, 8만643가구다. 이 중 45개 단지가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구)에 몰려 있다.

서울 주요 재건축 단지도 신탁방식 검토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남구에서는 압구정 3구역(현대 1~7차, 현대 10·13·14차, 대림빌라트), 압구정 4구역(현대 8차, 한양 3·4·6차)을 포함해 은마아파트, 개포주공5·6·7단지, 서초구에선 방배삼호, 신반포아파트 등이 조합설립인가 바로 전인 추진위 승인 단계다.

정비업계에서는 조합설립 신청이 안 되면 재건축 사업 추진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년 거주요건을 채우지 못한 조합원들이 속도를 조절하려고 할 공산이 커서다. 기존 소유자가 2년을 거주했더라도 신규 매수자 입장에서 무조건 2년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단지가치 하락도 불가피하다. 압구정 5구역은 가구당 평균 2억원의 집값 하락이 나타날 수 있다고 자체적으로 추산했다.

아직까지 신탁방식이 보편화돼 있지 않아 실제 추진 여부는 더 두고 봐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여의도 시범·광장 등이 신탁방식을 택했지만 인허가 문제 등으로 답보 상태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시어머니’가 생긴다는 막연한 거부감, 수수료 문제 등이 걸림돌”이라고 했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