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어려워도 협력사 결제 미루지 않았죠"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이광래 우미건설 회장(85·사진)은 어릴 적 부친을 여의어 학창시절부터 행상을 하며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직업군인의 길을 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제대 후 연금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곧장 사업에 뛰어들었다. 전자회사와 양돈사업에 잇따라 도전했으나 퇴직금 180만원만 날렸다.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다해 뛰어든 게 건설업이었다. 1982년, 그의 나이 49세 때다.

이후 37년간 주택사업 한 분야에 매진한 그는 20일 건설회관에서 열린 ‘2019 건설의 날’ 행사에서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 회장은 “주택사업을 시작한 이후 최고의 집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며 “37년간의 진심이 소비자와 국가 전체에 전해진 것 같아 자부심을 느낀다”고 감사 인사를 했다.

창업 당시 그는 사무실을 마련하지 못해 동업자의 대리점 구석에 책상 세 개를 놓고 직원 두 명과 업무를 시작했다. 1986년 아파트 사업에 진출할 때는 53세 나이에도 사무실에 침대를 놓고 숙식을 했다. 새벽 5시에 공사현장에 나가 밤 12시에 돌아오며 아파트 건설업에 사활을 걸었다. 그는 “당시 아파트 사업을 하는 건설사 사장 중 나이가 가장 많았지만 설계에서 분양까지 모두 직접 챙겼다”며 “그 덕에 평면 구성부터 단지 설계, 조경까지 주택에 대한 모든 것을 아는 경영자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연대보증을 섰던 4개 건설사가 부도 나 이를 모두 책임져야 했을 때도 있었다. 거래처와 쌓은 신뢰가 항상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우미건설을 전국적인 건설사로 키웠다. 1997년 외환위기가 왔을 때 대표적인 주택업체가 줄줄이 무너졌다. 이 회장은 이때 공급이 부족한 목포에서 공격적으로 아파트 용지를 사들였다. 그의 예상대로 경제가 회복 기미를 보이자 공급이 부족한 지역에서 아파트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우미건설은 그동안 주택을 7만 채 넘게 공급했다. 도로 건설 등 국가기간사업에도 참여하는 등 연매출 2조원의 회사가 됐다.

이 회장은 우미건설의 성장 배경을 정도경영과 원칙경영으로 꼽는다.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협력회사 자금 결제는 미루지 않았다. 깨끗한 납세를 중시해 다섯 번의 성실 납세 표창을 받았다. 가장 큰 자랑거리는 입주민의 만족이다. 2008년 경기 동탄신도시 ‘우미린 제일풍경채’ 입주민들이 단지 내에 이 회장을 위한 기념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이 회장 외에 고태식 준제이엔씨 대표, 김효진 한화건설 부사장 등 23명이 정부 포상을 받았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