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의 R까기] 폐업의 눈물 위에 등장하는 '슈퍼 을'
'건물주'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 '장래희망은 건물주' 등 건물주는 '불로소득(不勞所得)'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말들이 옛말이 되고 있다.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이어지면서 건물들의 공실이 늘고 있어서다. 같은 상권이라도 어떤 임차인이냐에 따라 건물주들의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문제는 '동네 상권'으로 불리는 지역 상권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 상권의 위축은 지역 경제와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자영업자들은 '장사가 잘되냐'의 문제를 지나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다. '폐업'을 고민하는 시기라는 얘기다. 임차인은 하루하루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러한 와중에 '슈퍼 을(乙)'로 등극하는 임차인이 속속 나오고 있다. 건물주들은 슈퍼 을을 위해 보증금을 동결하고 있다. 주차장, 각종 민원 등도 들어주고 있다.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상가임대차법)을 강력하게 적용하지 않아도 건물주와 임차인간에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 번 더 뜯어보면 씁쓸한 현실이 나온다. 임차인이 '슈퍼 을'이 된 배경에는 '폐업'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강북 아파트 밀집 지역에 자리잡은 A 김밥집도 이러한 경우다. 지역 내에서 솜씨가 좋아 장사가 잘되기로 소문난 김밥집이었다. 작년부터 동네에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A김밥집은 동네의 '슈퍼 을'이 됐다. 이유는 주변에 그럭저럭 장사를 했던 B 분식집, C 김밥집 등이 줄줄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B 분식집의 현실은 처참했다. 하루에 학생 손님 마저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떡볶이는 전문점에, 라면은 편의점에, 김밥은 김밥전문점에, 밥 메뉴는 배달전문점에 손님을 빼앗겼다. 그렇게 몇 달을 힘들어하다가 문을 닫았다. C김밥집은 '사람 뽑다가 지쳐서 폐업'한 경우였다. 김밥을 말아줄 직원을 뽑고, 숙련시킬만 하면 나가버렸다. 최저임금으로 고된 김밥말이를 견딜 직원은 많지 않았다. 직원들이 자주 바뀌다보니 '맛이 변했다'는 손님들의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장까지 몸이 안좋아지면서 결국 가게를 비우게 됐다.

[김하나의 R까기] 폐업의 눈물 위에 등장하는 '슈퍼 을'
A 김밥집의 매출은 작년보다 두 배 가까이 오른 상태다. 직원들 보너스도 챙겨주고 있다. 하지만 동네 사장들이 눈물로 폐업을 했던 이야기를 알기에 마냥 좋아할 수 만은 없는 형편이다. 장사가 잘 되는 슈퍼 을이라지만, 남의 불행 덕을 본 것 같아서 A 김밥집 사장의 마음이 좋지만은 않다.

김종율 보보스부동산연구소 대표는 이러한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한다. 김 대표는 "자영업자가 어려우면 당연히 건물주도 힘들다"며 "문제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폐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다"라고 지적했다. 골고루 장사가 잘되고, 그 중에 독특하게 시장을 선도하는 가게가 있는 게 이상적인 상권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폐업으로 인해 살아남은 가게들만 장사가 되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한경닷컴이 단독으로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8년까지 3만1639곳의 편의점이 문을 닫았다. 같은 기간 개업한 점포는 모두 6만3048곳이다. 개업 수 대비 절반 가까이 폐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연도별 폐업수를 보면 작년이 가장 많았다. 2018년 폐업한 편의점 수는 4272개로 2008년(1830개)에 비해 급증했다. 물론 시장이 늘어난만큼 숫자도 늘었겠지만, 그만큼 텅비는 상가들이 많아진 것이다.

이렇다보니 '건물주의 전성시대는 끝났다'는 말도 나온다. 일부 임차인만 장사가 잘 되는 구조에서 월세를 올린다는 건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역 상권에서 되는 곳만 된다면, 광역상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쉽게 말해 강남, 종로, 홍대 등 장사가 되는 곳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어떤 전망이 됐건 '부동산으로 편하게 돈 버는 시대'가 아닌 건 확실해 보인다.

김하나 한경닷컴 기자 ha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