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강남역 주변 한 건물에 공인중개사 학원 2곳이 들어서 있다. 양길성 기자
서울 서초구 강남역 주변 한 건물에 공인중개사 학원 2곳이 들어서 있다. 양길성 기자
낮 기온이 32도까지 치솟아 뙤약볕이 내리던 지난달 말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골목. 건물에서 책가방을 등에 맨 수십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20대 젊은 청년부터 퇴직 나이를 훌쩍 넘긴 중장년까지 연령층은 다양했다. 이들이 다녀온 곳은 공인중개사 학원. 2호선 강남역 주변에만 4곳의 공인중개사 학원이 모여 있다. 학원 앞에서 만난 대학생 임모씨(25)는 “취업에 하나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지난달부터 학원에 다니고 있다”며 “요즘은 평생직장 개념도 없는데 노후 대비를 위해서라도 자격증을 따는 게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청년부터 중년까지 공인중개사 자격증에 눈을 돌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올해 들어 주택 거래가 급감했는데도 공인중개업소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취업난이 극심한 데다 노후 대비 수단도 마땅치 않아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늘고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 개업 중개업소 역대 최고

2일 한국공인중개사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20일 기준 서울 지역에 영업 중인 개업 공인중개사는 2만4561만명이다. 역대 가장 많은 숫자다. 올 상반기만 670명(2.8%)이 늘었다. 이는 소속 공인중개사와 중개보조원 등을 제외한 수치로, 현재 영업 중인 중개업소 숫자다.

권역별로는 ‘강남 4구(강남·서초·송파·강동구)’ 지역이 포함된 동부지부 개업 중개사 수가 이달 6830명을 기록해 가장 많았다. 양천구와 강서·구로·금천·영등포·동작·관악구가 속한 남부지부가 6699명으로 뒤를 이었다. 서부지부(종로·중구·용산·성동·은평·서대문·마포구)는 5882명, 북부지부(광진·동대문·중랑·성북·강북·도봉·노원구)는 5150명을 기록했다.

공인중개사 개업은 갈수록 느는 추세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2012년 8만2931명에 그친 개업 공인중개사 수는 지난해 10만2100명까지 치솟았다.

공인중개사 자격 시험에 응시하는 수험생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지난해 공인중개사 1·2차 시험도 20만5197명이 응시하며 2013년(11만2160명)보다 2배가량 늘었다.

서초동 A공인중개사 학원 관계자는 “예전에는 퇴직한 50~60대가 주로 찾았는데 요즘은 20대는 물론 30~40대 주부도 많이 찾는다”며 “최근 집값이 크게 오르면서 부동산 시장에 관심이 늘어난 것도 인기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공인중개사 1·2차 시험엔 20만5197명이 응시해 2013년(11만2160명)보다 2배가량 늘었다. 사진은 강남의 한 공인중개사 학원 강의 내용. 양길성 기자
지난해 공인중개사 1·2차 시험엔 20만5197명이 응시해 2013년(11만2160명)보다 2배가량 늘었다. 사진은 강남의 한 공인중개사 학원 강의 내용. 양길성 기자
◆불안한 미래에… “보험은 있어야”

공인중개사 시험에 응시하는 이유는 비슷하다. 막연한 미래에 '보험' 하나가 필요해서다. 서울에서 아파트 청소·관리 업체를 운영하는 전모씨(54)는 지난해 11월 28회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년간 독서실에서 인터넷 강의를 듣고 공부했다. 퇴근 후 몸은 피곤해도 하루 2시간씩 틈틈이 시간을 냈다. 그는 “아파트 관리 일을 20년 넘게 하면서 자연스레 공인중개사에도 관심이 생겼다”며 “나중에 사업을 정리하고 부동산을 개업해 노후대비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창업·취업을 준비하는 20~30대 응시자도 부쩍 늘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공인중개사 시험에 응시한 20~30대는 38%(7만8245명)에 이른다. 2011년 6025명에 불과했던 20대는 지난해 2만1249명이 응시했다.

IT업계에서 7년째 일하고 있는 정모씨(32)는 지난달부터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자격증 취득 후 중개업소 개업 보단 부동산 투자를 하기 위해서다. 그는 “부동산 이론이나 관련 법을 배우면 투자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공부를 시작했다”며 “회사 생활로는 미래를 보장하기도 쉽지 않아 유망한 자격증을 미리 따 놓을 생각”이라고 했다.
문이 굳게 닫힌 서울 송파구의 한 중개업소. 한경DB
문이 굳게 닫힌 서울 송파구의 한 중개업소. 한경DB
◆거래량 주는데… 시장은 ‘포화’

다만 최근 아파트 거래가 급감하는 등 부동산 시장에 찬바람이 불면서 중개업소 운영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4월 서울 아파트 매매 거래량(6234건)은 전월(1만3837건) 대비 반토막 났다. 5월(5535건)에도 10% 이상 감소한 데 이어 지난달(20일 기준)에도 10% 이상 감소폭을 보였다. 가장 많은 중개업소가 몰린 강남 4구의 경우 6월 아파트 매매량이 1년 전과 비교해 10분의 1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10년 전인 금융위기 후 수도권 부동산 침체가 길어지면서 2008년 8만9428명이던 공인중개사 2차 시험 응시자 수는 2013년 3만9343명으로 급감했다. 2000년대 중반 100만건을 넘나들던 전국 주택 거래량이 2012년 73만5414건까지 떨어지면서 문을 닫는 중개업소가 속출해서였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 관계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보니 시장 환경이 어려운 줄 알면서도 개업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며 “막연한 기대에 개업했다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는 이들도 많다”고 지적했다.

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