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빚으로 지은 집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카드로 지은 집)’란 미국 드라마가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DC를 배경으로 정치권의 암투를 그린 드라마다. 카드로 지은 집이니 언제 무너질지 모를 아슬아슬함이 있다. 그렇다면 ‘하우스 오브 데트(House of Debt·빚으로 지은 집)’는 어떨까.

‘빚으로 지은 집’은 얼마 전 미국에서 출간된 경제학 서적의 제목이다. 아티프 미안 프린스턴대 교수와 아미르 수피 시카고대 교수가 함께 썼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그 이후의 ‘대침체기(Great Recession)’가 왜 발생했으며, 위기 재발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룬 책이다.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쓴 서평에서 이 책을 ‘올해 가장 중요한 경제학 서적’으로 꼽았고, 국내의 한 경제관료도 페이스북에서 토마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론’ 이후 또 하나의 화제작으로 언급했다.

미국 금융위기 근원은 빚

이 책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을 금융시스템 붕괴가 아니라 가계부채라고 진단한다. 과도한 부채 때문에 극심한 소비위축과 경기침체가 발생했고, 금융 시스템이 복구된 후에도 ‘부채의 덫’ 때문에 경기회복이 지지부진했다는 것이다.

또 자산가치(집값) 하락의 위험을 돈 빌린 사람이 우선 떠안는 부채 특성 때문에 사회의 소득불균형이 심화된다고 분석한다. 2만달러를 가진 사람이 8만달러를 대출받아 10만달러의 집을 산 경우 집값이 20% 떨어지면 집주인은 투자한 돈을 전부 잃게 되지만 은행, 경제 전체로 봐서 돈을 빌려준 여유 있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충격이 워낙 커 이때를 기준으로 ‘2008년 금융위기’라고 하지만 위기의 발단이 부채(서브프라임모기지)였다는 건 새로운 관점은 아니다. 그보다는 ‘금융’ 이슈 뒤에 있던 ‘부채’와 ‘소비’ 문제를 앞으로 끄집어낸 것이 의미 있어 보인다.

한국은 10여년 전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을 도입해 부동산 대출한도를 규제했다. 덕분에 미국과 같은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동산시장이 장기침체에 빠지면서 ‘하우스 푸어’ 문제가 대두됐다. 버는 돈의 상당 부분이 빌린 돈을 갚는 데 들어가다 보니 소비여력이 뚝 떨어졌다.

계절 바뀌어도 속옷은 입어야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은 경제활성화를 위해 부동산시장 살리기와 규제완화를 내걸었다. LTV·DTI 조정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 최경환 부총리 후보자는 ‘겨울에 여름 옷을 입고 있는 격’이란 표현을 썼다. 시장이 침체돼 있으니 과열기에 도입된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의미다. 근본적 처방 없이 효과가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많지만 최소한 시장 활성화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확인해 주는 계기는 될 것이란 평가다.

다만 10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는 여전히 부담이다. 빚을 늘려 뭔가를 부양하는 것은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미국이 양적완화를 끝내고 내년부터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 한국만 마냥 거꾸로 움직일 수도 없다. ‘부채’와 ‘소비’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수부양 측면에서도 가계 부채에 대한 세심한 관리가 중요하다. 계절이 바뀌어 겉옷을 바꿔 입더라도 속옷은 잘 챙겨 입어야 한다.

박성완 국제부장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