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형성된 강남 오피스 시장이 2000년대 초반 벤처기업 붐을 거쳐 2007년 부동산시장 정점을 고비로 20여년 만에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기업들의 '강남 엑소더스'에 따른 강남권 오피스시장의 내상(內傷)은 상상 이상으로 깊었다. 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선릉역까지 테헤란로 일대의 오피스 빌딩에는 현수막이 곳곳에 나붙어 있었다. 빈 오피스를 사용할 임차인이나 법인을 구한다는 내용으로 오피스 중개를 담당하는 회사나 개인 연락처가 어지럽게 적혀 있다. 현수막이 없는 빌딩에도 어김없이 임대를 알리는 사절지 크기 정도의 종이가 붙어 있다. 인근 중개업소에서는 "공실률이 50%에 이르는 선릉역 인근 D타워처럼 건물의 평판이 떨어질까봐 임대매물만 내놓고 공실은 쉬쉬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테헤란로에서 27년간 영업을 하고 있다는 한 공인중개사는 "빌딩 임차인을 구하는 전화나 건물주의 문의가 하루가 멀다하고 오고 있다"면서 "공실이 높은 빌딩을 묶어서 만든 팸플릿도 돌아다니는데 27년 만에 처음 보는 현상"이라고 혀를 찼다.

◆비어가는 강남권 오피스

강남권은 종로 등 서울 강북 도심권이나 여의도 등에 비해 오피스 임대가 원활했다는 점에서 최근의 공실률 증가는 특히 충격적이다. 자산관리업체인 신영에셋에 따르면 강남권은 서울의 다른 지역 오피스 공실률이 4~6%를 오르내릴 때도 3% 이하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는 유달리 취약한 모습을 보여 지난해 1분기 공실률 1%로 도심(1.2%)과 여의도(1.5%)보다 낮았던 강남권 공실률은 올해 1분기에는 4%로 각각 2.3%와 2.7%를 기록한 도심과 여의도보다 공실률 증가 폭이 컸다. 특히 테헤란로와 지하철 3호선 양재역 인근은 5%와 6%의 공실률을 보여 "5%를 넘으면 시장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본다"(박합수 국민은행 팀장)는 위험선을 넘었다.

개별 빌딩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테헤란로 대로변에 자리한 K빌딩은 20개 층 중 4개 층이 비어 있는 상태며 삼성역 인근의 S빌딩도 20개 층 중 6개 층이 임대매물로 나왔다. 오피스컨설팅 업체인 GNE어드바이저코리아의 김영제 대표는 "기업들이 사옥 이전을 앞두고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 등 실질공실률에 포함되는 부분까지 계산에 넣으면 강남권 오피스의 공실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1월 삼성전자 등 주요 삼성 계열사 직원 1만여명이 중구 태평로 삼성사옥에서 강남역 바로 옆 서초동 삼성타운으로 옮겨왔다. 이 중 삼성전자 직원 1200명이 경기도 기흥과 충남 탕정 등의 현장으로 전진 배치되면서 사무실이 빈방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도 강남권에는 빌딩의 신규 공급이 계속되고 있어 임차난을 가중시키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강남권에 지어진 오피스 빌딩은 6개로 연면적 16만㎡에 이르러, 63빌딩 하나가 새로 지어진 것과 맞먹는다. 강남권에 공급되는 신규 빌딩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공급 즉시 70% 이상 찼지만 지금은 절반도 못 채우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말 역삼동에 공급된 T빌딩은 반년이 넘도록 11개 층 중 7개 층이 비어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강남탈출'

기업의 규모에 상관없이 강남을 빠져나가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공실은 테헤란로 등 대로변 1급 빌딩부터 이면도로 2,3급 빌딩을 가리지 않고 늘어나고 있다. 대기업들은 강남 이외의 지역에 사옥을 신축했다는 이유로 강남을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지만 기저에는 역시 비용 문제가 깔려 있다. LS그룹 관계자는 "계열사들을 한 건물에 모아 시너지를 낸다는 계획이었는데 강남권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며 "큰 빌딩을 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비용도 지나치게 높았다"고 밝혔다. 강남구 2곳에 본사를 둔 삼성엔지니어링은 2011년 강동구 강일지구로 통합 이전할 계획이며 역삼동에 있는 포스코건설도 내년 6월에 인천 송도로 본사를 옮긴다.

건설사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업 이전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미 신성건설(강남역 주변)과 우림건설(서초동 교대역 근처)이 강남권에 위치한 사옥을 내놓은 상황이다. 유동성 확보를 위해 지하철 2호선 교대역 인근의 사옥을 매각하고 경기도로 빠져나간 성원건설처럼 비슷한 사례가 늘어날 수도 있다. '강남 엑소더스'의 원조인 벤처 · IT(정보기술)기업들의 이전도 계속되고 있다. 작년 말 역삼동에서 구로디지털단지로 이전한 벤처기업 A사의 대표는 "강남에 있던 오피스의 보증금에 대출을 조금 받았더니 아예 사옥을 사서 옮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남권에 남아 있는 기업들도 임대 규모를 줄이거나 1급 빌딩에서 2,3급 빌딩으로 옮기는 추세다. 테헤란로 대로변 빌딩 전체를 임대해 쓰던 대명리조트가 대로변에는 고객서비스 담당 일부 부서만 남기고 나머지를 이면도로에 있는 2급 빌딩으로 이전한 게 단적인 예다.

◆떨어지는 임대료

이런 상황이다보니 오피스 빌딩의 임대료도 속속 낮아지고 있다. 임대수익률이 매매가에도 영향을 주는 오피스 빌딩의 특성상 공실이 늘어나도 임대료는 깎지 않던 건물주들이 올해 초부터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임대매물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논현동의 한 빌딩은 지난 4월 월 1000만원을 임대료로 지불하던 중소기업이 회사를 이전해 2개 층이 비게 되자 월 임대료를 700만원으로 낮췄다. 오피스 임대시장의 비수기인 여름 이전에 임차인을 구하겠다는 의도였지만 지금까지도 비어 있는 상태다.

명목임대료는 내리지 않더라도 실질임대료를 깎는 경우도 많다. 1년 계약을 하면 한두 달은 임대료를 내지 않는 방식이다. 매매가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임대료를 깎아 공실률을 낮추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특히 매매가에 민감한 부동산 펀드 등이 소유하고 있는 오피스 빌딩의 경우 전체 임대 기간의 절반을 무상으로 임대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오피스중개업체 관계자는 "강남권의 거의 모든 빌딩에서 1년 계약하면 한 달,2년이면 두 달을 공짜로 임대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난해와 비교해 임대료가 5~10% 내린 셈"이라고 밝혔다.

공실률이 올라가고 임대료는 내려가면서 빌딩 관리업체도 적정 수준 이상의 관리비를 받지 못해 무료로 일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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