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재개발 구역은 바람잘 날이 없다. 사업 초기단계인 곳에서는 '예비(가칭) 추진위원회'가 난립,저마다 주민들에게 효력도 없는 '불법 동의서'를 받으려 혈안이다. 분쟁의 불씨는 여기서 싹튼다. 조합설립 이후에는 반대파가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 조합장이나 간부가 뇌물사건 · 공금횡령 등에 연루돼 구속되거나 해임되는 일도 다반사다.

재개발사업 관계자는 "서울 등 전국 6대 도시의 1000여개 재개발조합에서 진행 중인 사업의 이해당사자만 조합원과 세입자 등을 포함해 1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며 "이들이 일부 외부세력들에게 이용당하는 과정에서 서로 반목을 일삼는다"고 지적했다.




◆재개발조합은 복마전인가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한 음식점에 아현3구역 재개발 조합원 700여명이 모여 임시총회를 열고 조합장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조합 임원 성과급으로 74억원을 지급하려던 조합장 유모씨는 100억원대의 조합비 횡령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상태였다. 한때 비대위 측 경비용역과 조합 지지자들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비대위 대표인 이재주씨는 "분양가를 부풀린 데다 조합 임원들에게도 시공업체와 맺은 도급계약서를 보여주지 않는 등 조합장의 전횡이 심각했다"며 "옥중결재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가만히 두고 볼수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북부지검 형사6부는 지난 1일 관리처분과정에서 업체로부터 5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아현4구역 재개발조합 사무장 김모씨(불구속기소)에 대해 징역 4년에 추징금 5000만원을 구형했다. 아현4구역 조합원들은 조합 임원들을 모두 해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조합 측은 조합설립인가 때 제시한 공사비(3.3㎡당 239만원)보다 65%나 많은 396만원으로 관리처분계획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조합원 동의를 55%만 받아 요건(75%) 미달로 법원으로부터 무효 판결을 받았다. 마포 염리3구역에서는 조합 대의원들이 지난달 조합을 고소했다. 조합에서 추진위 시절의 회계감사보고를 아직도 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다.


◆줄잇는 다툼 · 소송

작년 6월 사업시행인가를 받은 성동구 금호13구역은 조합과 비대위(내재산 보호대책위원회) 간 갈등이 격화되면서 사업에 제동이 걸렸다. 일부 조합원과 조합 측이 서로를 상대로 낸 관리처분총회 금지 가처분과 조합임원 해임총회 금지 가처분 소송이 모두 받아들여져 총회가 미뤄진 것.비대위 관계자는 "조합 측이 총회를 앞두고 조합원 동의율이 낮자 일부 동의서를 본인도 모르게 위조했다"고 주장했다. 이 구역은 2003년 시공사와의 가계약 당시 건축비(금융비용 포함)가 3.3㎡당 260만원이었지만 본계약 때는 400만원으로 높아지자 일부 조합원들이 시공사 경쟁입찰을 요구했다. 하지만 조합이 기존 시공사와 수의계약 채결을 강행,다툼이 벌어졌다

2007년 12월 조합설립인가를 받은 동작구 상도11구역은 행정소송에 발목이 붙들렸다. 추진위원회 승인 처분 무효확인과 조합설립인가처분 취소,주택재개발구역 지정결정 취소 소송이 잇따라 제기됐다. 이 곳에서는 부동산개발업자와 땅소유주인 J법인 관계자가 짜고 조합설립추진위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기획소송'까지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흑석2 · 6구역도 조합설립 무효확인 소송이 걸려 있다. 흑석6구역 조합 관계자는 "'설계비와 건축비 등을 정확하게 공개하지 않았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한 비대위가 지난달 대법원에 상고했다"고 말했다.

마포구 북아현2구역과 성북구 장위1구역 등은 도시기반시설 부담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선년구 북아현2구역 조합장은 "지난달 법이 바뀌면서 국공유지 매입대금 200억원을 조합이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데 비대위 쪽에서는 추가 지출을 할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환 장위1구역 조합장은 "정비사업업체의 감정평가에 따르면 조합이 내야 할 도시기반시설 부담금이 100억원으로 산출됐다"며 "이럴 바엔 재개발을 안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격화되는 대립과 불신

지난 1월 '용산참사'가 벌어졌던 국제빌딩4구역 내 남일당 건물에는 여전히 철거 세입자들이 경찰에 맞서 분향소를 지키고 있다. 철거 작업은 5개월째 중단됐다. 이춘우 조합장은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 차원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어 공식적인 협의를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4구역에는 조합들 사이에 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 4구역 일부 조합원들로 구성된 비대위는 지난해 조합장을 비롯한 조합 이사 4명을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설계 · 시공 · 철거 · 정비용역 업체와의 계약서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 구역에서만 그동안 26건의 소송이 제기됐다.

작년 5월 조합장에 선출된 강석원 용산역 전면3구역 조합장은 "조합장 직무정지 소송과 총회 무효소송 등 소송만 4건이 걸려 있다"며 "고소 · 고발 없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구역의 이전 조합장이었던 정모씨는 건설업체로부터 수억원대의 금품을 받아 챙긴 혐의로 2007년 11월 검찰에 구속됐다.

지난해 관리처분인가가 난 용산역 전면 2 · 3구역은 상가 세입자 보상(영업손실보상금)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상가 세입자들은 "보상금이 권리금보다 턱없이 낮다"며 서울지방토지수용위원회에 이의를 신청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행정소송을 낸다는 방침이다.

영등포뉴타운 1-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의 경우 2003년 뉴타운 지정 이후 7년 가까이 조합설립인가 상태에서 제자리걸음이다. 2005년 정비구역 지정 당시 추진위원장이었던 J씨가 정비계획을 수립했지만,이듬해 조합설립총회에서 L씨가 조합장에 선출되면서 일이 꼬였다. L씨가 설계업체를 바꾸고 정비계획을 새로 짜자 J씨는 비대위를 만들어 임시총회를 무산시키는 등 대립하고 있다.

국제업무지구 조성이 추진되는 서부이촌동 일대 용산 재개발 구역에는 통합개발과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 간 갈등의 골이 깊다. 이곳에는 비상대책위만 11개나 된다. 서부 이촌동 동원 · 대림 · 성원 등 3개 아파트 주민들이 만든 비대위는 "지은 지 3~15년밖에 되지 않은 아파트까지 허물려 한다"며 통합개발 반대 동의서를 서울시에 제출했다. 또 주민 50%의 동의만 받으면 나머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개발을 할 수 있도록 한 '도시개발법'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도 냈다.

지방도 사정은 비슷하다. 부산 감천2구역 주민들과 조합은 주민분담액 문제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서대신1 · 괘법1 · 금곡1 · 명륜2구역 등에서도 조합설립무효 소송을 하거나 준비 중이다. 광주광역시 광천1구역에서는 2006년 4월 구성된 추진위가 20여차례나 송사에 휘말려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

이건호/노경목/박종서/이호기/성선화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