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떠도는 단기부동자금이 무려 50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기업 자금사정 지원 등을 위해 유동성 공급을 늘리고 기준금리도 사상최저 수준으로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풀린 자금이 생산부문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뜻에 다름아니고 보면 정말 걱정이 크다. 시중자금의 단기부동화는 경기침체 및 금융시장 불안 등의 영향으로 위험자산 회피(回避)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데다 기업구조조정 작업 등이 겹친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머니마켓펀드(MMF),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이 급증세를 보인 것은 그런 연유다. 특히 실물경제에 자금을 공급해야 할 은행들마저 MMF 같은 단기상품에 돈을 묶어두는 게 현실이라고 하니 돈맥경화 현상이 심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금융위원회가 어제 발표한 은행권의 1월 중기 지원실적을 봐도 이런 점은 뚜렷이 드러난다. 정부의 대출확대 독려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중기대출 증가액은 3조1000억원에 그쳐 최근 5년간의 1월 평균증가액(3조8000억원)에도 미달했다. 게다가 의사 등 전문직 자영업자에 대한 대출을 중기대출로 처리하는 식의 편법까지 동원됐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중소기업들이 실제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양상이 더 이상 이어져서는 정말 곤란하다. 아무리 자금을 공급해도 단기상품으로만 몰린다면 통화정책의 효과는 기대난이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란 이야기까지 나오는 형편 아닌가.

따라서 정부와 금융당국은 실물경제 쪽으로 여유자금이 흐를 수 있게 하는 데 총력을 경주(傾注)하지 않으면 안된다.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임으로써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은 신속히 퇴출시키되 일시적 자금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대해선 충분한 자금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식이나 채권 등 증권 쪽으로 투자를 유인하는 방안도 강구해 봐야 함은 물론이다. 특히 은행권의 자세 전환이 절실하다. 지금처럼 리스크 회피에만 매달리다간 기업부도가 더욱 늘어나고 그리 되면 결국 은행에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을 명심하고 대출확대에 적극 나서주기 바란다.